시네마 클래식

[칼럼] 잔혹한 미학의 재구성, <물랑루즈(1952)>와 엇갈린 운명의 초상

infodon44 2026. 2. 6. 1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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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론: 몽마르트르의 안갯속에서 마주한 기묘한 기시감

오늘 밤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모래알처럼, 사랑이라는 신기루가 덧없게 느껴지는 고독한 밤이다. 나는 차가운 위스키 한 잔을 곁에 두고 1952년 존 휴스턴이 빚어낸 **<물랑루즈(Moulin Rouge)>**를 다시 틀었다. 이 영화는 신체적 결함이라는 천형을 짊어진 채 파리의 밤을 캔버스에 옮겼던 화가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렉의 삶을 다룬 비정한 걸작이다. 화려한 캉캉 춤의 리듬 뒤에 숨겨진 로트렉의 고독은, 80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 내면의 가장 어두운 구석을 날카롭게 파고든다. 특히 로트렉의 뒤틀린 육체와 그가 갈구했던 사랑의 괴리는 인간 존재의 본질적인 결핍을 상기시킨다. 이 글에서는 <물랑루즈>가 어떻게 시각적 미학을 통해 예술가적 실존을 증명했는지 분석하고, 그 비정한 서사가 오늘날 우리 각자의 삶과 어떻게 공명하는지 심층적으로 다뤄보겠다.

 

1. 테크니컬러로 복원한 19세기 파리의 퇴폐와 예술

테크니컬러로 복원한 19세기 파리의 퇴폐는 1952년작 <물랑루즈>가 영화사에서 차지하는 가장 독보적인 시각적 성취다. 존 휴스턴 감독은 로트렉의 실제 포스터와 유화에서 사용된 독특한 색감을 스크린에 그대로 옮겨오기 위해 특수 필터를 사용했으며, 이는 당시 영화계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무랑루즈 카바레의 문이 열리고 캉캉 춤의 강렬한 드레스 자락이 휘날리는 장면은 단순히 화려함을 넘어, 로트렉이 관찰했던 그 시대의 습한 공기와 퇴폐적인 향기를 생생하게 재현해 낸다. 이러한 시각적 연출은 로트렉의 내면적 고립을 시각적으로 극대화한다. 화려한 색채의 향연 속에서 홀로 고립된 듯 앉아 코냑을 들이키며 스케치를 하는 로트렉의 모습은, 예술가가 세상과 소통하는 유일한 방식이 '관찰'임을 증명한다. 휴스턴 감독은 배경의 조명을 의도적으로 낮추고 인물들에게 강렬한 원색을 배정함으로써, 보헤미안 사회의 생동감과 그 이면에 흐르는 우울함을 동시에 포착했다. 이는 관객으로 하여금 로트렉의 캔버스 안으로 직접 걸어 들어가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며, 그가 느꼈던 타인과의 거리를 물리적인 색채 대비로 느끼게 한다.

 

2. <물랑루즈(1952)>: 신체적 결함과 영혼의 고독이 빚어낸 예술적 실존

영화 **<물랑루즈(1952)>**의 핵심 서사는 육체적 감옥에 갇힌 로트렉이 예술을 통해 자신의 존재 가치를 어떻게 증명하는가에 집중한다. 명망 높은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으나 사고로 성장이 멈춘 다리를 가지게 된 앙리에게, 물랑루즈는 도피처이자 유일한 진실의 공간이었다. 호세 페레는 무릎으로 걷는 고통스러운 연기를 통해 로트렉의 신체적 제약과 그로 인한 뒤틀린 자아를 완벽하게 묘사했다. 그는 카페의 무용수들과 매춘부들을 그리며 자신과 같은 소외된 영혼들에게서 고귀한 아름다움을 발견한다. 여기서 드러나는 실존적 고뇌는 사랑의 실패를 통해 더욱 깊어진다. 거리의 여인 마리에게 농락당하고, 진정한 사랑이었던 미리암마저 자신의 자격지심으로 떠나보내는 로트렉의 모습은 비정하기 짝이 없다. "내 다리가 조금만 더 길었더라면"이라는 탄식은 그가 평생 짊어지고 간 원죄와 같은 갈망이다. 영화는 로트렉을 결함을 극복한 영웅으로 그리기보다, 그 결함 안에서 고독하게 침잠하며 세상을 날카롭게 응시하는 관찰자로 그림으로써 하드보일드한 고전의 품격을 유지한다. 이는 사랑조차 구원이 되지 못하는 냉혹한 현실을 투영하며 예술의 비극적 숭고함을 완성한다.

 

3. 예술가적 헌신과 자멸적 열정의 이중주

이 영화를 지탱하는 세 번째 축은 예술가적 헌신과 자멸적 열정 사이의 위태로운 균형이다. 로트렉은 밤새도록 그림을 그리고, 낮에는 알코올에 의지해 고독을 견딘다. 그에게 그림은 생존의 이유였지만, 동시에 그를 죽음으로 몰아넣는 독약이기도 했다. 영화 후반부, 건강이 악화된 로트렉이 자신의 고향 대저택으로 돌아가 부모님의 곁에서 임종을 맞이하는 장면은 몽마르트르의 화려함과 대비되며 관객의 가슴을 저민다. 그의 죽음 직전, 물랑루즈의 환상들이 방안을 가득 채우며 그에게 작별을 고하는 시퀀스는 압권이다. 그는 가문의 전통과 명예보다는 거리의 무명 화가로서, 밤의 여인들의 친구로서 남기를 선택했다. 이는 기성 권위에 대한 예술가의 무언의 저항이자, 자신의 고통을 회피하지 않고 예술이라는 거울에 정면으로 투영시킨 진정한 보헤미안의 태도를 상징한다. <물랑루즈>는 한 예술가의 죽음을 통해 우리에게 묻는다. 무엇이 진정으로 가치 있는 삶인가? 화려한 가문의 이름인가, 아니면 고독 속에서 피워낸 단 한 장의 불멸의 그림인가? 로트렉의 마지막 미소는 그 질문에 대한 가장 슬프고도 아름다운 답변이 된다. 새벽의 정적 속에서 1952년의 로트렉을 마주할 때, 나는 오래전 몽마르트르가 아닌 어느 서울의 찻집에서 보았던 그 남자를 떠올렸다. 그는 의대생이었고, 기묘하게도 영화 속 로트렉을 빼닮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는 나를 연모했으나, 내 마음은 이미 그를 만나기 전부터 얼어붙은 선을 긋고 있었다. 호감 없는 만남을 극도로 혐오하던 내가 왜 그를 몇 번이나 꾸역꾸역 만나러 나갔는지는 지금도 미스터리다. 하지만 그 연극의 막은 예기치 못한 도망으로 끝났다. 약속 장소에 먼저 도착해 있던 내 시야에 그가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을 때, 나는 형언할 수 없는 거부감을 느꼈다. 마주하고 싶지 않다는 본능이 발바닥을 자극했다. 나는 그가 들어오던 문 반대쪽, 좁은 비상구 문을 열고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등 뒤로 닫히는 문소리와 함께 밀려오던 그 시원한 해방감, 그 상쾌했던 공기를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4년 뒤, 직장으로 걸려온 그의 전화는 예전과 달리 건조했다. 친구 결혼식에 못 갔다는 사무적인 말로 마무리된 그 통화가 우리의 마지막이었다. 나중에야 알았다. 그가 6년 동안 나를 일방적으로 짝사랑해 왔다는 것을. "왜 결혼 안 하세요?"라는 물음에 그가 내 이름을 불렀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슬픔보다는 허무를 느꼈다. 사랑이란 참 별거 아니다. 손가락 사이로 다 빠져나가는 모래알, 혹은 로트렉이 쫓던 몽마르트르의 신기루 같은 것. 만약 내가 영화 속 로트렉을 먼저 보았더라면, "어마나, 그 화신의 남자가 내 앞에 있네"라며 그와 깊은 사랑에 빠졌을까? 부질없는 가정이다. 그가 사랑했던 대상은 실제의 나일 리 없고, 나 역시 그저 흐르는 시간의 한 페이지였을 뿐이다. 그는 결국 동급생 의사와 결혼했고, 우리의 젊은 날은 그렇게 다음 장으로 넘어갔다. 로트렉의 캔버스가 마르기도 전에 덧칠해지듯, 우리의 기억도 그렇게 무뎌져 가는 것이다. 오늘 밤, 싱크대에 부어버린 위스키처럼 그 기억의 잔향만 이 영화 위에 흩뿌려본다.

마치며: 몽마르트르의 안개는 걷히지 않고

1952년작 <물랑루즈>는 시간이 흘러도 바래지 않는 고전의 위엄을 보여준다. 존 휴스턴의 선구적인 연출과 호세 페레의 처절한 연기는 로트렉이라는 한 위대한 인간의 영혼을 스크린 위에 온전히 부활시켰다. 화려한 캉캉 춤의 리듬 속에 숨겨진 고독의 무게를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이 영화가 선사하는 그 비정한 위로를 거부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결핍을 안고 살아간다. 누군가는 그것을 숨기려 애쓰고, 누군가는 그것에 짓눌려 무너진다. 하지만 로트렉은 자신의 결핍을 캔버스 위에 당당히 펼쳐 보임으로써, 고통조차 아름다움이 될 수 있음을 증명했다. 오늘 밤, 당신의 고독이 위스키 한 잔으로도 달래지지 않는다면 1952년의 파리로 떠나보길 권한다. 당신이 도망쳤던 그 비상구 문 뒤에 무엇이 남았든, 로트렉의 그림자 속에서 당신은 당신만의 진실한 조각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당신의 엇갈린 운명에, 그리고 그 모래알 같은 사랑의 기억에 건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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