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민속학

by 하이델베르그 2025. 3. 20.

서문

우리나라에서 오랜 역사를 가진 ‘계(契)’는 공동체적 삶을 영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본 글에서는 계의 개념, 종류, 기원, 그리고 발생 시기에 대해 상세히 알아보고자 한다.

 

1. 계의 정의

계는 농촌 주민들의 필요에 따라 자연적으로 형성된 집단으로, 두레나 품앗이보다 더 보편적이고 활발하게 운영되었다. 계는 그 기원이 불분명하고 종류가 매우 다양하며, 기능 또한 복잡하기 때문에 단순히 정의하기는 어렵다. 계의 본질적인 특징으로는 계원의 상호부조, 친목, 통합, 공동이익 추구가 있으며,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일정한 규약을 제정하여 운영되었다. 많은 연구자들은 계가 공동체적 성격을 지닌다고 보지만, 우리나라의 계는 공동체라기보다는 이익집단 또는 기능집단에 더 가깝다고 평가된다. 즉, 계는 특정 지역사회의 일부이지만, 지역사회 전체를 대표하는 개념은 아니며, 특정한 이해관계를 함께 추구하는 집단으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2. 계의 종류

계는 그 종류가 매우 많으며, 1938년 조사에 따르면 명칭이 다른 계만 해도 480가지에 달했다. 계의 분류는 조직의 목적, 외적 형태, 기능 등을 기준으로 나뉘었으며, 특히 기능에 따른 분류가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하나의 계가 여러 기능을 수행하는 경우도 있고, 동일한 명칭의 계가 서로 다른 기능을 가지는 경우도 있어 명확한 구분이 쉽지 않았다. 과거의 연구를 종합하여 계를 다음과 같이 여섯 개 범주로 나눌 수 있다.

 

1) 경제적 기능을 수행하는 계

경제적 목적을 가진 계로는 농업 생산 및 경제 활동과 관련된 것들이 포함된다. 농계(農契): 농업 생산을 위한 협력 조직 보계(洑契): 저수지 및 농업용수 확보를 위한 조직 식리계: 금융 및 투자 목적의 계 구우계(購牛契): 소를 공동 구매하여 농업에 이용하는 조직

 

2) 정치적 기능을 수행하는 계

지역 사회의 공공 비용 마련 및 정치적 협력을 위한 계들이 포함된다. 동계(洞契): 마을 단위의 공공 기금을 운영하는 계 보안계(保安契): 지역 치안을 담당하는 조직

 

3) 복지적 기능을 수행하는 계

계원의 복지와 상호부조를 목적으로 하는 계들이 여기에 속한다. 혼상계(婚喪契): 혼인과 장례 비용을 공동으로 마련하는 계 혼구계(婚具契): 결혼에 필요한 용품을 공동으로 마련하는 계

 

4) 종교적 기능을 수행하는 계

제사 및 종교 의례를 중심으로 형성된 계들이 포함된다. 종계(宗契): 조상의 제사를 위한 계 문중계: 문중의 유지 및 관리 조직 동제계: 마을 단위로 동제를 지내는 조직

 

5) 교육적 기능을 수행하는 계

교육을 목적으로 하는 계들이 여기에 포함된다. 학계(學契): 학문을 배우기 위해 형성된 계 서당계: 서당을 운영하는 비용을 마련하기 위한 계

 

6) 친목 및 오락 기능을 수행하는 계

계원의 친목과 오락을 목적으로 하는 계들이다. 시계(詩契): 시문을 즐기는 문인들의 모임 문우계(文友契): 학문을 교류하는 모임 동갑계: 같은 나이대의 사람들이 친목을 다지는 계 유산계(遊山契): 산행을 목적으로 하는 친목 모임

 

3. 계의 기원

계의 기원에 대해서는 다양한 학설이 존재하며, 현재까지 명확한 결론이 나지 않았다. 학자들은 계의 기원을 약 20가지로 구분하고 있다.

 

원시공동체적 원생조직설

원시공산체적

상호부조설

원시촌락공동체적 생산관계설

촌락공동체 부담의 공동해결조합설

고대촌락의회설 고대종교의례설

두레설

향도설(香徒說)

가배설(嘉俳說)

토지신의 제사와 결부된 지연적 촌락조직설

친목적 회연설(會宴說)

조합설

길드설

향약설 고려 말 호포제설(戶布制說)

조선시대 군포제설(軍布制說)

납세단체설

봉건적 악정에 대한 자위적 대항조직설

전자본주의적 고리대자본에 대한 대항조직설

자연발생설

여기에 공동체설을 포함하면 총 21가지에 달한다. 이처럼 계의 기원에 대한 다양한 설이 존재하는 것은 계의 형태와 기능이 매우 복잡하고, 시대와 지역에 따라 다르게 발전했기 때문이다.

 

4. 계의 발생

시기 계가 언제 발생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다음과 같은 주장들이 있다. 삼국시대 이전 성립설: 일부 학자들은 계가 삼국시대 이전부터 존재했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신라시대 성립설: 신라의 향도(香徒)가 계의 전신이라는 주장도 있다. 고려시대 성립설: 고려 후기부터 본격적으로 등장했다는 견해 조선시대 성립설: 조선 시대에 계의 형태가 체계적으로 자리 잡았다는 주장 특히, 조선 시대 이전의 자료가 부족하여 정확한 발생 시기를 단정하기 어렵다. 그러나 조선 시대에 이르러 계가 다양한 형태로 분화하고, 사회 전반에 걸쳐 활용된 것은 확실하다.

 

5. 조선시대의 계

조선시대의 계(契)는 사회적 연대와 경제적 상호부조를 위한 조직으로, 다양한 목적과 형태로 운영되었다. 특히, 민족항일기에는 계의 역할과 운영 방식이 변화하였으며, 일제의 정책적 개입으로 인해 전통적인 계의 기능이 변질되기도 하였다. 아래에서는 조선시대 계의 개념과 역할을 중심으로 민족항일기의 변화, 계첩의 구성, 조직과 운영 방식, 가입과 탈퇴, 존속과 해체, 재산 운영 등을 상세히 살펴본다.

 

1) 민족항일기의 계 형태

* 계의 수 증가

조선시대의 계는 민족항일기에 들어서면서 급격한 변화를 경험하였다. 1926년과 1938년에 이루어진 조사를 보면, 이 기간 동안 계의 수가 2만 개에서 3만 개로 증가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계가 사회적, 경제적 필요에 따라 더욱 활성화되었음을 의미한다. 특히, 경제적 불안정이 심화되면서 상호부조의 필요성이 커졌고, 이에 따라 계의 수가 증가하는 경향을 보였다.

 

* 계의 목적 변화

계의 목적은 시대적 변화에 따라 달라졌다. 계의 전체 숫자에서 공공사업과 오락을 목적으로 하는 계의 비율이 증가한 반면, 전통적인 금융이나 상호부조 계의 비율은 상대적으로 감소하였다. 그러나 계의 가입 목적을 살펴보면, 여전히 약 60%의 계가 상호부조를 주된 목적으로 운영되었고, 전체 계원 중 약 50%가 이러한 계에 가입하고 있었다. 이는 조선시대의 계가 기본적으로 상호부조 기능을 담당했음을 보여준다. 흥미로운 점은 1938년 기준 계원의 총수가 약 90만 명에 달했으며, 계당 평균 인원이 약 30명으로 1926년보다 감소한 것이다. 이는 계 조직이 소규모화되면서 더욱 세분화되었음을 시사한다. 또한, 금융을 목적으로 하는 계의 평균 인원이 다른 계보다 많아지는 경향이 나타났다. 하지만 계 재산의 형태를 보면, 상호부조 계는 현금 보유량이 적었으나 토지를 많이 보유하고 있어 다른 계보다 자산 면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 계의 재산 형태 및 일제의 개입

계의 재산은 현금, 토지, 곡물, 가축, 농기구 등 다양한 형태로 존재하였다. 그러나 일제는 계 활동에 대해 직접적, 간접적으로 개입하였으며, 지방관청을 통해 계를 지속적으로 감시하고 감독하였다. 일부 계는 적극적으로 보호·장려한 반면, 하층 계층의 금융 개선을 목적으로 한 식리계(殖利契), 산통계(算筒契), 작파계(作罷契) 등은 탄압하였다. 특히, 민족항일기에는 금융조합의 하부조직으로서 식산계(殖産契)가 대표적인 계로 자리 잡았다. 식산계는 생산품의 판매, 필수품의 구매, 공동시설 건설 등의 활동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정책이 계의 전통적인 기능을 강화하기보다는 한국 경제를 식민지적 상품시장으로 전락시키는 방향으로 진행되면서, 전통적인 계는 상업자본주의 체제에 편입되어 변질되었다.

 

2) 조선시대 계첩(契帖)의 구성

계첩은 계의 운영과 규칙을 기록한 문서로, 대체로 네 가지 주요 항목으로 구성되었다.

 

* 계첩의 주요 구성 요소

서(序, 완의): 계 설립의 배경, 목적, 역사 및 효과 등을 서술. 입의(立議, 절목, 계헌, 범례 등): 계 규약 및 운영 규칙 명시. 좌목(座目): 계원 명부로, 양반 계원일 경우 생년 간지, 호, 본관 등을 기재. 발(跋): 계 성립의 전말을 기록, 주로 양반 계에서 작성됨.

 

* 근대적 변화

민족항일기 이후 계첩의 규약은 보다 체계적으로 정리되었으며, ‘장(章)’과 ‘조(條)’로 세분화되었다. 이는 근대적 회칙이나 정관의 형식을 띠게 된 것이며, 현대의 조합 규약과 유사한 모습을 보인다.

 

 3) 계의 조직 및 운영 방식

* 조직 범위 및 계원의 자격

계 조직의 범위는 일반적으로 한 마을을 중심으로 형성되었으나, 경우에 따라 지역을 초월하여 구성되기도 했다. 계원의 자격은 특정한 기준이 적용될 수도 있고, 별다른 제한 없이 주거지를 기준으로 가입할 수도 있었다.

 

* 계원의 수와 종류별 특징

계원의 수는 최소 2명에서 수백 명까지 다양했다. 일반적으로 송계, 동계, 학계 등은 규모가 컸으며, 반면 금융이나 상호부조를 목적으로 한 계는 상대적으로 소규모였다.

 

* 계의 임원 및 역할

계장(契長): 계를 대표하며, 재산과 신망이 높은 연장자가 담당. 유사(有司): 계의 실무를 담당하며, 임기는 보통 1~2년. 장재(掌財): 계의 재산 관리 및 자금 출납 담당. 서기(書記): 문서 및 장부 관리.

 

4) 계의 가입과 탈퇴

* 가입 방식

강제 가입: 공공사업을 목적으로 한 계. 자발적 가입: 저축계, 오락계 등 개인적 목적 계.

 

* 탈퇴 규정

일부 계에서는 탈퇴를 금지하였으며, 대표적인 예로 1778년 가좌동 금송계가 있다. 그러나 계규약을 어기거나 사망하는 경우에는 자연스럽게 탈퇴되었다.

 

5) 계의 존속과 해체

금융 계는 존속 기간을 정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사업 목적을 달성하면 해산됨. 일부 계는 계원 과반수 동의로 해산 가능. 종계 및 문중계는 오랜 기간 존속하며, 300~400년간 유지된 사례도 존재.

 

6. 계의 재산 운영

1) 출자 방식

출자 방식은 크게 일시출자, 정기적 분납, 수시출자, 적립형, 복합형 등으로 구분되었다.

 

2) 재산 관리 및 운영

계 재산은 계원의 공유 자산이며, 일반적으로 계장이 명의 보유. 계 재산은 계원 대출, 사업 지원 등에 활용됨. 일부 계에서는 외부인에게도 대출을 허용. 조선시대 계는 공동체 내에서 중요한 경제적·사회적 역할을 수행하였으며, 민족항일 기를 거치면서 그 형태와 기능이 변화하였다. 현대의 금융조합과 사회적 협동조합의 기원으로 볼 수 있는 계는 한국 사회의 전통적 협력 정신을 잘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마치며

계(契)는 한국 사회에서 오랜 역사와 함께 발전해 온 중요한 사회적 조직으로, 상호부조와 공동이익을 위한 기능적 집단으로 자리 잡아 왔다. 다양한 목적과 형태를 지닌 계는 경제적, 정치적, 복지적, 종교적, 교육적, 오락적 기능을 수행하며 지역사회 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계의 기원과 발생 시기에 대해서는 다양한 학설이 존재하지만, 그 본질은 공동의 필요를 충족하고자 하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협력 형태에서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조선 시대에 들어서면서 계의 형태가 체계화되고, 사회 전반에 걸쳐 조직적으로 활용된 점은 계의 지속적인 발전을 보여준다. 오늘날 현대 사회에서도 계의 개념은 다양한 형태로 남아 있으며, 상호부조 및 친목을 위한 모임, 금융 및 협동조합의 형태로 이어지고 있다. 전통적인 계는 점차 사라지고 있지만, 본질적인 의미는 여전히 유지되며, 변화하는 시대 속에서 새로운 방식으로 적용되고 있다. 계는 단순한 친목 단체를 넘어 공동체의 결속을 강화하고, 경제적·사회적 기능을 수행하는 중요한 조직이었다. 앞으로도 계와 같은 협력 조직이 현대적 환경에 맞춰 적절히 변화하며 공동체 발전에 기여할 수 있을지에 대한 연구와 논의가 필요할 것이다.

'민속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두레  (0) 2025.03.20
공동체  (0) 2025.03.20
혼례  (0) 2024.05.03
민속극 - 진도 다시래기  (0) 2024.05.03
조선시대의 무속  (0) 2024.05.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