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
국가의 금지에도 불구하고 민중들은 물론 조선 궁중에서도 조차도 성행했던 조선시대 무속의 세계에 대해 살펴보자.
1. 무격신앙의 성행
풍농을 기원하던 고대의 제천의식은 신라와 고려시대에는 산천제·기우제 등으로 이어졌다. 조선시대는 음사를 배척하던 유교주의국가였음에도 이러한 공동제의 만은 그대로 허용됐다. 특히, 고려 중엽부터 산신제의 일부였던 서낭제는 조선시대에는 국행관제(國行官祭)나 일반 민중의 촌락제로도 받아들여져 성행했다. 반면 무격은 속된 것으로 여겨 금하는 법령을 내리고 이를 성 밖으로 내몰았지만 고려시대 중엽부터 성행하던 무격신앙은 조선시대에 이르러 더욱 널리 퍼지게 된다.
결국 조선 시대 전반에 걸쳐 무격신앙이 성행하였다.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보자면 15, 16세기 임진왜란 전에는 산천제·서낭제·기우제 등 공동제의가 성행하였으나, 임진왜란이 끝난 17, 18세기에는 치병이나 개인적인 저주를 푸는 형식으로써의 개인굿이 성행하였다.
지역적 특색으로 보면 서낭신앙은 함경도와 강원도에서 발전하였고 전라도에서는 오락적인 무희(巫戱)가 성행하였다. 특히 정치적 알력이 난무했던 서울에서는 저주 주술이 발전하였고, 대륙과 이어지는 평안도와 황해도에서는 구병제(병이 들었을 때에 병을 고치기 위하여 무당을 불러 벌이는 굿)가 널리 퍼졌다.
2. 무속의 유형
조선시대의 무속은 크게 두가지 유형으로 나타났다.
1) 조선왕실 속 무속
조선 왕실에서도 무속을 받아들여 국무당을 세우고 궁중 나례(儺禮)에 무녀·광대 등으로 구성된 무격집단을 동원하여 기우제·서낭제 등을 지내는 이율배반적인 형태를 보이게 된다. 또 관공 의료기관인 성수청(星宿廳)이나 활인서(活人署)에는 의생과 함께 무격을 두어 민중의 병을 책임지게 하였다.
궁중에서도 성행한 무속은 태종 18년(1418) 성녕대군(誠寧大君)이 천연두로 죽게 되자 형조(刑曹)는 국무당 가이(加伊)와 무녀 보문(寶文)에게 책임을 물어 힐책하였고, 세종 2년(1420) 6월 병세가 깊어진 대비를 위해 무당을 시켜 신에게 제사하도록 하였다. 연산군 때는 굿을 하기 위해 매우 빈번하게 무녀들을 궁중에 불러들였다. 중종 10년(1515) 때는 국무당 돌비(乭非)가 궁중을 드나들며 굿을 했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에는 특히 궁중여인들 사이에 질투와 시기가 오가며 서로 무당을 시켜 저주하는 풍습이 성행하였다. 숙종 때 장희빈(張禧嬪)과 궁중무의가 저주를 행하였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며, 19세기말에도 굿을 좋아한 민비(閔妃)에 의해 나라의 굿이 끊이지 않았다. 무격을 관할하는 관공서도 있었다. 태조 때부터 동서 두곳에 활인원(活人院)을 두었다. 이에 소속된 무당들은 전염병 치료를 담당했다. 이는 공적의료기관이었으며 임진왜란 때는 잠시 중단되었지만 조선 말기에 이르기까지 계속 존립했다.
2) 민중들의 무속
조선시대는 민중들 사이에서도 무속이 널리 퍼졌다. 조선시대의 민중들 사이에 성행하던 무풍의 폐단에 대해서는 신하들의 상소문 속에서 짐작할 수 있다.
≪세종실록≫의 세종 11년 9월조에 “지금의 세속은 예로부터 내려오던 무격의 요사하고 허탕한 말에 현혹되어 이를 높이 신봉하니, 집과 들 어디서든 음사를 행하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이는 비단 서민만의 문제가 아니라 사대부의 집안에서도 이어져 떳떳이 행하고 있으니…….”라고 하였다.
≪성종실록≫의 성종 9년 11월조에는 “요새 사람들은 다투어서 귀신을 믿습니다. 범사의 길흉화복을 한 번은 무당에게 들어봅니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와 같이 조선시대에 널리 퍼졌던 무격신앙은 많은 폐해를 가져왔다. 따라서 조선 초기부터 무격을 배척하고 무당굿을 금하였지만 무속은 조금도 변색되지 않고 이어졌다.
3. 조선시대의 무당
조선시대 무당을 부를 때 여자는 흔히 무녀라 하였고, 성종 때는 현수(絃首)라고도 불렸다. 연산군 때는 성수청에 있는 국무가 도무녀(都巫女)와 종무녀(從巫女) 등으로 구분해서 불렸다. 그리고 특히 신이 실려 신탁을 말하는 무녀는 공창(空唱)이라 불렸으며 때로는 태자무(太子巫)라고도 했다. 남자무당은 흔히 화랑·낭중·양중(兩中) 등으로 불렸다. 국무(國巫)는 말 그대로 궁을 출입하거나 활인서 또는 성수청과 같은 관공서에 소속된 무당들이었다. 그리고 지방 촌읍 수령의 아내(衙內)를 드나드는 무당은 아무(衙巫)라고 불려졌다. 관무를 국무라고 했듯이 지방관청에서 주관하는 무당은 내무녀(內巫女) 또는 내무당이라고 불렸다. 신이 내려 무당이 되는 것은 조선시대에도 마찬가지 형태였다. 무격은 고대로부터 사회적 기능을 부여받은 사제자·구병자, 점복하는 예언자였다. 나아가 고려시대에 들어와서는 영들을 구사하여 길흉을 바꿀 수도 있는 사령자(使靈者)로서의 기능이 발전되었고, 한편으로는 노래와 춤 그리고 악공[樂工](악기를 연주하는 사람) 으로써의 기능도 발휘하게 되었다. 조선시대는 이러한 여러 가지 기능들이 이어져 그대로 발전됐다.
4. 굿
무격은 굿을 통해 각종 기능을 발휘했다. 조선왕조실록의 기사를 통해 당시 다음 세가지의 굿의 종류와 양상을 알 수 있다.
1) 기복제
공동제례인 산천제나 서낭제는 기복제의 성격을 띠었다. 특히, 기은(祈恩)이라 함은 예능인들그리고 무당 박수가 모여 왕가의 평안과 다복을 산천과 서낭신에게 비는 것을 말한다. 이는 별기은(別祈恩)이라고도 불리었는데 이는 고려 말기부터 흔히 치러졌다. 조선 초기의 태종 때는 봄·가을로 송악·백악·감악산 등지에서 기은제를 치렀고, 또다시 별기은제가 다시 돌아와 이것이 같은 행사가 아니냐고 예조(禮曹)가 계(啓)를 올리자 왕은 “별기은은 오해 전부터 있어왔던 거라 이제 와서 폐지하는 것이 옳지 않다.” 해 그대로 진행되었다. 이러한 기복제는 비단 왕실 뿐만 아니라 사대부나 서민들도 무격과 귀신을 믿고 산천이나 서낭에 제를 올렸는데 이를 기은 또는 반행(半行)이라고 하였다. 이것이 점차 마을 전체의 촌락공동제로 발전하게 되었다.
2) 구병제
구병제(救病祭)로 치병은 예로부터 무격이 지녔던 최고의 기능이었다. 고대인들은 귀신의 조화로 병이 든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귀신과 교제하는 무당들만이 구병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세종 때는 동서활인서의 무격들에게 각리각호(各里各戶)를 전담하게 하고 열병이 돌 때 의생과 함께 이를 해결하도록 하였다. 또한 전염병이 창궐할 때 무당들을 불러들여 무사귀신(無祀鬼神)과 역신(疫神)에게 여제(厲祭)를 올리는 것이 풍습이었다.
3) 사령제
사령제(死靈祭)란 사람이 죽으면 죽은 이의 영을 위로하기 위한 위령제를 뜻한다. 갑작스런 사고나 한을 갖고 죽은 영혼은 산 사람에게 해꽂이를 한다고 생각했다. 해서 조선시대의 사령제의 가장 중요한 목적과 기능은 단순한 위로를 떠나 죽음의 살(煞)을 풀어 망령의 저승길을 잘 닦아 주는 데 있었다. 이러한 사령제는 뜰에서 이루어져 이를 흔히 야제(野祭)라고 하였다.
마치며
조선시대의 무속은 국가에 의해 금지되었지만, 백성들과 심지어 궁중에서도 인기를 끌었다. 이러한 신앙은 백성들의 삶에 깊은 영향을 미치며, 그들의 신앙과 문화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러한 민간신앙의 전통은 오늘날까지도 역사의 보물로 남아 있다.
'민속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혼례 (0) | 2024.05.03 |
---|---|
민속극 - 진도 다시래기 (0) | 2024.05.03 |
조선시대의 민간신앙과 개화기 이후 (0) | 2024.05.03 |
풍수 (1) | 2024.05.03 |
놀이 - 아이들의 놀이와 아낙네들의 놀이 (0) | 2024.05.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