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
조선시대는 무속신앙과 민간신앙이 서로 얽혀 그 시대의 화려한 영적 풍경을 형성했다. 반면 개화기 이후에는 서구문물의 유입과 일본의 탄압으로 우리 고유의 신앙이 크게 위축된 시기였다.
1. 조선시대의 민간신앙
1) 무속신앙의 번
조선시대에는 불교는 억압했지만 무속신앙은 계속 번창했다. 하지만 금무(禁巫)라는 국가정책에 따라서 무속이 지나치게 표면에 드러나고 지나친 행동으로 이어지는 것은 다소 제한되었다. 사제무가 기우 · 기은 · 기자 · 산천제 · 성황제 등을 지냈으며, 성수청과 활인서 같은 국가기관에 국무(國巫) 또는 무녀를 두어 국민의 질병을 치료하게 하였다. 그 외에도 인간사의 길흉을 점치는 점복무(占卜巫)가 크게 성행하였다.
2) 여러신에 대한 민간신앙
또한, 고려시대 못지않게 여러 신에 대한 민간신앙도 성행하였다. 건국 초 태조는 한강 서쪽에 원단(圓壇)을 설치하고 천신에게 제를 올렸으며, 마니산에 단을 설치하여 천신에게 예를 다했다.
백악산 · 송악산 · 감악산 · 삼각산 등 4악산에서 산신제를 올렸으며 전국의 주요 산들과 모든 마을에서도 산신제가 치러졌다. 이 밖에도 천신(川神) · 삼해신(三海神) · 칠독신(七瀆神) 등이 있어서 무녀를 비롯해 백성들이 즐겨 기도를 올렸다. 그 외에도 당시 예를 올렸던 여러 신들은 다음과 같다.
* 암석신
암석신은 산신과 연관된 존재로 돌의 신령을 믿는 암석숭배도 성행했다.
경주 금오산의 산아당암(産兒堂巖)과 상사암(想思巖), 서울 자하문 밖의 기자암과 인왕산 선바위 등은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기자암(祈子巖)이다.
* 동물신
동물신으로는 산군(山君)으로 여겨져 산신으로 숭상하였던 호랑이는 물론, 재산신으로 숭배되었던 두꺼비, 인간수명과 재복, 그리고 강우까지 관장한다 믿었던 사신(蛇神), 수신으로 여겨졌던 용에 대한 신앙까지 여러 동물신이 크게 성행하였다.
* 수목신
수목신은 나무 하나하나에도 신령이 깃들어 있다고 믿었으며, 특히 오래된 거목은 나무의 정기가 깃들어 있다고 믿어 ‘신수’라고 하여 함부로 베지 못하였다. 마을 안에 있는 거괴수(巨槐樹)는 당신목(堂神木)으로 숭배되었으며 서낭당 · 산신당 · 장승 근처에 있는 수목들도 신목으로 여겨져 손댈 수 없었다.
* 가택신
특히, 조선시대에는 많은 가택신들이 나온다. 집안의 신들 중에서 성주신은 가장 높아서 대들보 위에 있으며 집안의 평안 · 무병 · 장수 · 행운 · 다남 등을 매우 중요한 일을 관장한다 믿어 상달인 10월에 성주굿이 치러졌다.
* 그 외의 다양한 신
이 밖에도 다양한 신이 있어 땅의 신인 토주신(土主神), 재물과 복록을 관장하는 사창신(司倉神), 곡식에 관여하는 제석신(帝釋神), 부뚜막신인 조왕신(竈王神), 문간의 출입에 관여하는 수문신(守門神), 변소에 있는 신인 측신(厠神), 천연두를 막아주는 역신(疫神) 등이 신봉되었다. 이들 신에 대해서는 나름대로의 의식이 있었고 독특한 신앙방법이 전승되고 있다.
또, 고려 때와 마찬가지로 수호신으로는 서낭 · 장승 · 소도 등을 두었는데 이 중 서낭 신앙이 크게 성행하였다. 전국의 명산은 물론 마을 입구, 고갯마루에 이르기까지 많은 수의 서낭당이 세워졌다. 이 밖에 부근신(付根神) · 대감신(大監神) · 풍신(風神) · 태자귀(太子鬼) · 미명귀(未命鬼) · 야광귀(夜光鬼) · 도깨비 등에 대한 다양한 민속신앙이 나오게 되었다. 전내대감(殿內大監) · 토주대감 등 10여 종으로 나눠지는 대감신이 있으며, 풍신은 2월 1일 하늘에서 지상에 내려왔다가 20일에 다시 하늘로 돌아간다고 한다. 명두라고도 하는 태자귀는 어린아이의 죽은 영혼을 뜻하며, 점이 영험하다 하여 부녀자들이 많이 찾았다. 미명귀는 억울하게 죽은 사람의 원혼이 세상에의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산 사람에게 붙어 악행을 저지르는 악귀이다. 해서 민간에서는 불의의 사고로 죽은 사람이 미명귀가 되지 않도록 위령제를 지냈다. 민간전설에는 이 미명귀에 얽힌 이야기가 많다. 천계에 있다가 설날 밤에 인가로 내려와서 신발을 신고 간다는 귀신이 야광귀이다. 해서 설날밤에는 신발을 모두 방 안으로 들여놨다. 이 야광귀가 신발을 신고 간사람은 흉사가 있다 하여 이를 막기 위하여 뜰에 대나무나 나무로 만든 긴 막대기에 체를 매달아 두었다고 한다.
2. 개화기 이후
조선시대와는 달리 개화기 이후에는 서구문물의 유입과 함께 민간신앙이 크게 위축되었다. 특히, 서양의학의 출현은 무당의 의술적 기능을 크게 핍박했다. 1910년 이후 일본은 우리의 고유신앙을 탄압하면서 민간신앙을 미신으로 간주했다. 무당이나 점술사를 탄압하면서 마을의 동제를 금하고 신사를 부수기까지했다. 3 · 1운동 이후 일제는 군중들의 집결에 위협을 느껴 민생과 치안의 이유를 들어 산신제 · 기우제 · 별신제 등의 제사와 석전(石戰) · 차전(車戰) 등의 민속놀이까지 금지하였다.
8 · 15 광복 이후에도 일제 36년을 거친 우리나라는 서구의 교육과 생활양식이 깊게 침투해 현대생활 속에서 민간신앙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다만, 일부 지방에서 전승되어 온 굿이나 마을신앙이 명맥을 이어올 뿐이다. 하지만 민간신앙은 민족의 뿌리와도 같은 것이라 완전히 배제될 수 없는 것이다. 오늘날 토정비결을 보고 미륵에게 정성을 바치며 점을 치고, 동짓날 악귀를 쫓기 위해 팥죽을 먹는 등 민속명절을 지키고 따르는 것도 민족의 마음속 뿌리에 대한 향수라 할 수 있다.
마치며
조선 시대에 만개했던 민간 신앙을 뒤로하고 개화기 이후에는 일본의 탄압으로 인해 크게 위축되었던 시기도 있었다. 하지만 오늘날에도 우리를 사로잡는 영역과의 심오한 연결을 맛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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