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
고려 시대는 표면적으로 불교와 유교가 국가의 기둥이었지만, 백성들의 삶 속에는 또 다른 강력한 정신적 뿌리가 깊게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민속신앙'입니다. 이는 단순한 믿음을 넘어, 고려인들의 일상적인 희로애락과 공동체의 안녕을 책임지던 살아있는 정신세계였습니다. 지금부터 고려 시대 민속신앙이 어떻게 사람들의 삶 속에 깊이 스며들고, 다른 종교와 어우러지며, 오늘날까지 그 흔적을 남겼는지 그 다채로운 모습을 탐험해 보겠습니다.
1. 자연과 삶에 깃든 신령들
고려인의 세계관을 빚어낸 신앙의 지도 고려 시대 사람들에게 세상은 그저 물리적인 공간이 아니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모든 자연물과 삶의 현상 속에는 신령한 기운이 깃들어 있다고 믿었으니, 이는 마치 거대한 신들의 태피스트리 속에 살고 있는 것과 같았습니다. 이러한 '범신론적(汎神論的) 세계관'은 고대부터 이어져 온 우리 민족의 깊은 자연관을 반영하며, 고려 민속신앙의 가장 근본적인 특징을 이룹니다. 고려인들이 섬기던 신령들은 실로 다양했습니다. 하늘을 주재하는 천신부터, 땅을 지키는 지신, 그리고 산과 물을 다스리는 산신과 용신은 물론, 집안 곳곳에 깃든 가신(家神), 마을의 수호신인 서낭신에 이르기까지, 셀 수 없이 많은 신들이 인간의 삶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산은 단순히 흙과 나무로 이루어진 지형이 아니라,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보살피는 신령스러운 존재가 거하는 성스러운 공간으로 여겨졌습니다. 고려 시대에는 덕적산, 백악산, 송악산, 목멱산(남산) 등 주요 명산에 산신제를 지내며 국가의 안녕을 기원했는데, 이는 산신 신앙이 민간을 넘어 국가적 차원에서도 중요하게 인식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송악산신이 거란족 침입을 막았다는 전설은 산신이 나라를 지키는 수호신으로까지 인식되었음을 말해줍니다. 동물이나 식물에 대한 믿음도 깊었습니다. 사슴, 거북, 까치 같은 동물들은 길흉을 예고하는 신령한 존재로 여겨졌습니다. 사슴이 은혜를 갚아 후손이 번성했다는 설화나, 거북을 살려주어 복을 받았다는 이야기는 동물의 신성함과 보은 사상을 보여줍니다. 또한, 거미가 아침 식탁에 내려오면 길조, 저녁에 나타나면 흉조로 여겼듯이, 작은 생명체 하나에도 의미를 부여하며 삶의 지혜를 구했습니다. 마을의 오래된 거목은 마을을 지키는 신수(神樹)로 숭배되었고, 함부로 베면 신벌을 받는다고 믿었습니다. 쑥은 단옷날 채취하여 약으로 쓰면 모든 병을 물리친다고 믿었고, 복숭아나무 가지나 잎은 귀신을 쫓는 벽사(辟邪)의 힘을 지녔다고 여겨졌습니다. 이처럼 고려인들은 자연의 모든 현상과 생명 속에서 신의 숨결을 느끼며, 그들과 조화롭게 살아가려 했습니다. 이러한 신들은 때로는 인간에게 복을 주고 지켜주는 존재였지만, 때로는 죄를 지은 인간에게 고통을 주기도 했습니다. 신의 뜻은 곧 세상의 모든 운명을 좌우한다고 믿었기에, 신령들은 인간에게 경외와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두려움은 단순한 공포가 아니라, 신성한 존재에 대한 깊은 존경과 맞닿아 있었습니다. 신의 노여움을 달래고 복을 빌기 위한 다양한 의례들이 일상 속에서 끊임없이 행해졌습니다.
2. 삶의 불안을 다독인 제의:무격의 역할과 신명나는 굿판
고려 시대 민속신앙은 추상적인 믿음에 머물지 않고, 삶의 구체적인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다양한 '제의(祭儀)'로 발현되었습니다. 그 중심에는 신과 인간을 잇는 특별한 존재, 바로 '무격(巫覡)'이 있었습니다. 무당이나 박수라 불리던 이들은 신병(神病)이라는 신비로운 경험을 통해 신의 부름을 받고, 신의 영을 받아들이는 존재로 인식되었습니다. 신의 선택 앞에서는 성별이나 사회적 지위, 즉 귀천이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고려사≫에 고위 관료의 가족이나 심지어 남성이 신내림을 받아 무당이 된 사례가 기록되어 있듯이, 무격은 사회 계층을 아우르는 존재였습니다. 무격은 고려 사회에서 다방면에 걸쳐 중요한 기능을 수행했습니다.
첫째, 신과 인간의 중재자였습니다. 가뭄이 들면 '기우제(祈雨祭)'를 올리고, 나라에 경사가 있으면 '기은제(祈恩祭)'를 지내는 등, 국가의 중요한 의례에도 무격의 역할은 필수적이었습니다.
둘째, 질병과 재앙의 치유사였습니다. 당시 의학으로는 해결하기 어려운 병은 귀신이나 조상의 원한 탓으로 여겨졌고, 무격은 굿을 통해 이러한 영적인 문제를 해결하여 병을 치유했습니다. 송나라 서긍이 ≪고려도경≫에서 "고려는 약보다 귀신을 더 믿는다"고 기록한 것은 당시 무속의 치병 행위가 얼마나 광범위했는지를 증언합니다.
셋째, 미래를 예언하는 예지자였습니다. 혼란스러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무격의 신탁은 미래의 불확실성 속에서 방향을 제시하고 불안을 해소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무속 의례의 정점은 바로 '굿'이었습니다. 굿은 단순한 종교 행사를 넘어, 춤과 노래, 음악이 어우러진 종합 예술이었습니다.
12세기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에 묘사된 굿의 풍경은 오늘날과 놀랍도록 닮아 있습니다. 신단이 마련된 방 안에서 무당은 요란한 장구 소리에 맞춰 술을 마시고 껑충껑충 뛰는 춤을 추며 신을 맞이합니다. 신이 내리면 무당의 입을 통해 신의 메시지인 '공수(公數)'가 나오는데, 이는 주로 길흉화복을 점치고 액운을 막는 '비방(秘方)'을 일러주는 내용입니다. 굿당은 남녀노소, 귀천을 막론하고 신의 가르침을 듣고 복을 빌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로 가득했습니다. 그들은 무당에게 금품을 바치며 간절한 소원을 빌었고, 무당의 공수를 통해 불안을 해소하고 희망을 얻었습니다. 이처럼 굿은 신과 인간이 만나 신명나게 소통하는 장이자, 공동체가 함께 슬픔을 나누고 희망을 다지는 치유의 공간이었습니다.
3. 전통의 지혜와 융합의 미학: 고려 민속신앙의 지속과 변용
고려 시대 민속신앙은 외래 종교인 불교, 유교, 도교가 유입되면서 다양한 방식으로 변화하고 융합되었습니다. 이는 민속신앙이 가진 강한 생명력과 다른 문화를 포용하는 우리 민족의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불교의 대표적인 행사였던 '연등회(燃燈會)'와 '팔관회(八關會)'는 민속신앙과 불교가 절묘하게 결합된 사례입니다.
연등회는 부처님께 등불을 공양하는 불교 의례였지만, 민간에 널리 퍼지면서 고대부터 전해오던 '천신제'의 요소와 융합되어 축제의 성격이 강해졌습니다. 팔관회 역시 불교 의례 속에 토착 신인 '세신(歲神)'을 위한 제사가 포함되었고, 음주가무를 즐기는 '신명'의 요소가 강조되었습니다. 사찰 안에 산신각이나 칠성각이 존재하는 것도 불교가 민속신앙의 산신, 칠성 신앙을 포용한 결과입니다. 이처럼 불교는 민속신앙의 대중적 요소를 흡수하여 스스로의 영향력을 넓혔고, 민속신앙은 불교라는 '고등 종교'의 외피를 통해 그 생명력을 이어갔습니다.
고려 왕실 또한 민속신앙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고려 왕실의 성씨인 왕씨(王氏)들은 해룡신의 후손이라고 자처하며 용신에 대한 추앙이 컸습니다. 용산제는 고려 왕실과 관련된 대표적인 민속신앙 의례로, 용신에게 제사를 지내며 국가의 안녕을 기원했습니다. 성종은 '사직단(社稷壇)'을 건립하여 토지신과 곡식의 신에게 제사를 올렸고, 문종 때는 최초의 서낭당으로 보이는 '성황사(城隍祠)'를 두어 가뭄 시 기우제를 올리는 등, 왕실 또한 민속신앙의 요소를 국가적 차원에서 수용했습니다.
고려 시대에는 마을의 수호신인 '장승'과 '서낭'도 널리 세워졌습니다. 장승은 보통 남녀 한 쌍으로 마을 어귀에 세워져 액운을 막고 마을을 지키는 수호신 역할을 했으며, 서낭은 신목(神木)과 돌무더기로 이루어져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는 대상이었습니다. 삼한 시대부터 존재했던 '소도(蘇塗)'의 흔적도 남아있는데, 이는 신성한 공간으로서 국법도 미치지 못했던 종교적 자유 구역이었습니다. 솟대처럼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이러한 상징물들은 민속신앙이 삶의 모든 영역에 영향을 미치며, 조상들의 생각과 행동을 지배했던 중요한 정신적 토대였음을 보여줍니다. 동짓날 팥죽을 먹거나, 연말에 잡귀를 물리치는 '구나의식' 또한 고려 시대부터 이어져 온 민속신앙의 중요한 부분입니다.
마치며
고려 시대 민속신앙은 우리 민족의 삶과 문화에 깊이 뿌리내린 소중한 유산입니다. 자연과의 교감, 신과 인간의 소통, 그리고 공동체의 안녕을 기원했던 조상들의 지혜는 불교와 같은 외래 종교와의 융합 속에서도 그 독자적인 생명력을 잃지 않고 면면히 이어져 왔습니다. 왕실부터 마을 어귀까지, 삶의 모든 순간에 스며들어 있던 민속신앙은 고려인들의 삶을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이자,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근원적인 힘이었습니다. 이 소중한 유산을 기억하고 탐구하며 보존함으로써, 우리는 과거의 지혜를 통해 현재를 살아가고 미래를 준비하는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