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제주도를 찾는 이들의 발걸음이 닿는 곳마다 넉넉한 미소와 우직한 풍채로 반기는 돌하르방. 이 돌 조각상은 단순히 관광 상품이나 지역 상징물을 넘어, 거친 파도와 바람 속에서 살아온 제주인들의 삶과 정신이 고스란히 응축된 민속학적 보고입니다. 투박한 돌 속에 제주민의 해학과 간절한 염원이 어떻게 스며들었는지, 지금부터 민속학자의 시선으로 깊이 들여다보고자 합니다.
1. 관청을 지키던 옹중석에서 마을의 수호신, 그 기원의 이중성
제주 올레길을 걷다 보면 마치 오랜 친구처럼 마주치는 돌하르방의 존재는 섬사람들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풍경입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이 돌하르방이 처음부터 '돌하르방'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전 제주에 산재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들의 기원은 오히려 권위 있는 관청의 문지기, 즉 **'옹중석(翁仲石)'**이라는 훨씬 딱딱하고 경건한 이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돌하르방은 1754년(영조 30년)경, 김몽규 목사가 제주목, 대정현, 정의현이라는 세 곳의 읍성에 세웠던 **'옹중석'**으로 처음 기록됩니다. 당시 이 돌상은 관아의 입구를 지키며 외부의 잡귀나 나쁜 기운이 관청으로 침범하는 것을 막고, 동시에 관아의 권위를 상징하는 위압적인 존재로 세워졌습니다. 마치 육지의 장승이 마을의 경계를 알리고 잡귀를 물리치듯, 옹중석은 읍성의 수문장 역할을 했던 것이죠. 넉넉하고 인자한 현재 돌하르방의 모습과는 달리, 당시 옹중석은 국가의 질서와 권위를 대변하는 상징물로서 훨씬 더 엄격하고 위엄 있는 존재로 인식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그리고 특히 제주가 육지와 격리된 독자적인 문화를 형성하면서, 이 옹중석들은 점차 그 경직된 관청의 옷을 벗어던지고 민중의 품으로 내려앉기 시작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하르방(할아버지의 제주 방언)'이라는 친근한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고, 점차 마을 곳곳으로 확산되며 진정한 **'마을의 수호신'**이자 **'친근한 동네 어른'**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초기 옹중석의 임무였던 '잡귀 물리치기'는 그대로 계승되었지만, 그 방식은 훨씬 더 온정적이고 해학적으로 변화한 셈입니다. 이러한 변화는 제주도민들이 자신들의 수호신마저도 딱딱한 권위에서 벗어나 해학적인 웃음으로 재해석하려는 그들만의 독특한 정신세계와 공동체 의식을 반영합니다. 돌하르방은 이처럼 국가적 권위의 상징에서 시작하여 민중의 정서와 만나, 섬 특유의 문화를 담아내는 상징물로 변모한 역사적 맥락을 품고 있는 것입니다.
2. 돌하르방 코를 만지면 '아들 낳는다'? 생명의 염원과 여성의 은밀한 주술
제주도 관광객이라면 한 번쯤 들어봤을 법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돌하르방 코를 만지면 아들을 낳는다"는 속설이죠. 이미 너무 유명해서 평범해 보일 수 있지만, 이 속설 안에는 거친 제주 땅에서 생명을 이어가려는 제주 여인들의 처절한 염원과 은밀한 주술 문화가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이 속설은 단순히 '코를 만지는 행위'를 넘어, 삶의 고단함 속에서 피어난 원초적인 생명력 숭배를 드러냅니다. 화산 활동으로 형성된 제주 땅은 돌과 바람, 그리고 척박한 토양으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아들을 낳아 가문을 잇고, 힘든 노동력을 충당하는 것은 생존과 직결된 문제였죠. 남아 선호 사상은 단순히 유교적 관념을 넘어, 혹독한 자연환경 속에서 가족과 공동체를 유지하려는 간절한 소망이었습니다. 하지만 제한된 의료 환경과 잦은 풍파 속에서 출산은 늘 위험한 고비였고, 아기를 잃는 아픔도 다반사였습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돌하르방의 코를 만지는 행위는 단순한 미신을 넘어섰습니다. 남성의 성기를 상징하는 코에 손을 대는 것은 생명의 근원인 남성의 기운을 받아 아이를 잉태하고 싶다는 은밀하고도 원초적인 주술 행위였습니다. 남성성의 상징이자 가장 돌출된 부분인 코를 직접적으로 만짐으로써, 그 기운을 몸으로 흡수하여 출산의 기적을 기원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공개적으로 드러내기 어려운 여인들의 속 깊은 염원을 돌하르방이라는 익명적이고 친근한 수호신에게 털어놓고 의지하는 과정이었습니다. 코 만지기가 특정 성별의 아이를 바라는 주술로 변용된 것 자체도 제주의 강력한 모계 문화(해녀 등 여성의 경제활동이 강했던)와는 다른, 고된 현실 속에서 굳건히 가족을 지탱하려 했던 여인들의 양면적인 삶의 자세를 보여줍니다. 돌하르방은 이처럼 척박한 땅에서 생명의 강인함을 꿈꾸었던 제주 여인들의 숨겨진 속내와 염원을 조용히 들어주던 무언의 수호자였던 셈입니다.
3. 강제징용 노동자들의 '돌 조각': 이국땅에 세워진 '또 다른 돌하르방'
제주 돌하르방은 주로 제주 지역의 특산품인 현무암으로 만들어지며, 특유의 표정과 형태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주의 품을 벗어나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일본 곳곳에도 제주 현무암으로 만들어진, 돌하르방을 닮은 돌 조각들이 서 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습니다. 이는 일제 강점기, **일본으로 강제 징용되어 끌려갔던 제주도 노동자들의 아픔과 향수가 담긴 또 다른 형태의 '수호신'**입니다. 1930년대부터 1940년대에 걸쳐 수많은 제주도민들이 일자리를 찾아 혹은 강제적으로 일본 탄광이나 건설 현장에 끌려갔습니다. 이들은 고향을 떠나 이국땅에서 극심한 차별과 고된 노동에 시달렸습니다. 극한의 외로움과 고통 속에서, 제주 출신 노동자들은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안전한 귀향을 염원하며, 낯선 땅에 고향의 상징인 현무암으로 돌 조각상을 만들어 세웠습니다. 일본의 탄광촌이나 당시 징용자들이 머물던 막사 근처, 혹은 그들이 일했던 공사 현장에서 작고 투박한 형태의 돌 조각들이 간간이 발견되곤 하는데, 이들은 놀랍도록 돌하르방의 형태와 표정을 닮아있습니다. 제주 땅의 상징이자 수호신인 돌하르방을 닮은 이 돌 조각들은 고된 이국생활 속에서 노동자들의 정신적 지주이자 작은 안식처가 되어주었습니다. 이 '이국땅의 돌하르방'은 단순히 고향을 그리워하는 향수를 넘어선 깊은 의미를 지닙니다. 강제징용이라는 참혹한 현실 속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고향의 수호신에게 기대어 살아남기를 바랐던 간절한 생존의 염원이었습니다. 낯선 곳에서 고향의 돌을 깎아 세우는 행위는 육체적인 고통을 넘어선 정신적 치유와 스스로를 지키고자 하는 마지막 몸부림이었던 것이죠. 이 작고 투박한 돌 조각들은 제주의 역사 속에서 돌하르방이 단순히 유쾌한 웃음을 넘어, 고통스러운 현실을 인내하고 이겨내려는 민족의 강인한 의지와 염원을 대변하는 진정한 수호신이었음을 보여주는 가슴 아픈 증거라 할 수 있습니다.
결론: 제주, 그리고 인간의 희로애락을 담은 돌
돌하르방은 제주 땅에 굳건히 서서 비바람을 맞으며 때로는 신의 권위를, 때로는 민중의 해학을 대변해 온 진정한 수호신입니다. 권위적인 옹중석에서 친근한 하르방으로 변모하며 섬사람들의 삶에 스며들었고, 척박한 환경 속 생명의 간절한 염원을 담아내며, 심지어 고통스러운 이국땅에서도 망향의 아픔과 생존의 의지를 지켜보는 침묵의 증인이 되어주었습니다. 돌하르방은 단순한 돌 조각이 아닌, 제주 사람들의 희로애락과 그들이 지켜온 가치, 그리고 인간이 삶의 역경을 헤쳐나가는 방식에 대한 깊은 통찰을 담고 있는 살아있는 민속학 교과서입니다. 이 돌 조각에 담긴 이야기는 과거의 흔적을 넘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따뜻한 위로와 지혜를 선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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