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알랭 레네의 《지난해 마리앙바드에서》를 처음 봤을 때 나는 남자의 말을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계속 고민했다. 남자는 여자에게 지난해 이곳에서 만났다고 말한다. 두 사람이 함께 떠나기로 약속했다고도 한다. 그런데 여자는 그런 일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한다. 처음에는 나도 자연스럽게 남자의 기억이 맞는지 틀리는지를 따라가려고 했다. 그런데 영화를 계속 보다 보니 다른 것이 더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호텔이 이상했다.** 긴 복도가 계속 나오고, 사람들이 그 안을 걷는다. 정원도 여러 번 보인다. 그런데 분명 같은 호텔과 정원인 것 같은데, 보고 있으면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조금씩 헷갈린다. 이게 현재의 장면인지, 남자가 말하는 지난해의 일인지도 확실하지 않다. 처음에는 내가 영화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서 그런 줄 알았다. 그런데 영화를 다 보고 나서는 오히려 그게 영화가 일부러 그렇게 만든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1. 처음에는 호텔이 그냥 배경인 줄 알았다
이 영화에서 호텔은 굉장히 눈에 띈다. 복도는 길고 반듯하게 이어지고, 방과 방 사이의 공간도 비슷한 모습으로 반복된다. 정원에는 나무와 조각상이 일정한 형태로 놓여 있다. 사람들이 그곳을 걸어 다니는데도 이상하게 살아 있는 공간이라는 느낌이 약하다. 특히 정원의 모습이 기억에 남는다. 나무가 늘어서 있고 조각상이 놓여 있는데, 사람들은 그 사이를 걸어간다. 그런데 보통 영화에서 정원은 인물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려주는 배경 역할을 한다. 이 영화에서는 오히려 반대인 것 같다. 정원을 보고 있어도 내가 지금 어느 시간에 있는지 알 수가 없다. 복도도 마찬가지다. 사람이 복도를 걸어가면 보통은 ‘아, 저 사람이 저쪽으로 이동하고 있구나’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지난해 마리앙바드에서》에서는 그 단순한 이동조차 이상하게 느껴진다. 비슷한 복도가 계속 나타나고, 인물들이 어디에서 나타났는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 확실하게 잡히지 않는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 나는 남자의 이야기를 확인하려고 화면을 보는 것이 아니라, **화면 자체를 믿어도 되는지를 생각하게 됐다.**
### 2. 남자의 기억을 확인하려고 할수록 더 어려워진다
남자는 지난해에 있었던 일을 아주 자세하게 이야기한다. 여자를 언제 만났는지, 두 사람이 어떤 이야기를 나눴는지 계속 설명한다. 이렇게까지 자세하게 이야기하니까 처음에는 오히려 진짜 기억처럼 느껴진다. 그런데 여자는 계속 아니라고 한다. 여기서 조금 이상한 일이 생긴다. 남자의 이야기가 사실인지 확인하려면 지난해의 장면을 보면 될 것 같다. 그런데 영화는 그 장면을 우리가 확실하게 확인할 수 있도록 보여주지 않는다. 남자가 이야기하는 과거와 현재의 장면이 뚜렷하게 나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이 부분이 이 영화에서 꽤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만약 영화가 “이것이 지난해의 일이다”라고 확실하게 보여줬다면 우리는 남자의 기억이 맞는지 판단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그 기준이 없다. 그래서 남자가 거짓말을 하는 것인지, 정말로 기억하고 있는 것인지조차 쉽게 판단할 수 없다. 더 재미있는 것은 나도 어느 순간 남자의 이야기를 믿고 있었다는 것이다. 남자가 워낙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니까 나도 모르게 그 일을 실제로 있었던 일처럼 받아들이게 된다. 그런데 화면을 다시 보면 확실한 증거가 없다. 그때 나는 조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영화 속 남자만 기억을 믿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나 역시 남자가 만든 이야기를 기억처럼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이다.**
### 3. 그래서 마지막 장면이 처음과 다르게 보였다
영화 마지막에 남자와 여자가 함께 떠나는 듯한 모습이 나온다. 처음 봤을 때는 나도 여기에서 답을 찾으려고 했다. ‘결국 남자의 말이 맞았던 건가?’ 그런데 다시 생각해 보면 꼭 그렇게 볼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정말 지난해에 두 사람이 만났을 수도 있다. 남자의 기억이 대부분 사실일 수도 있다. 반대로 남자가 자신이 원하는 일을 과거의 기억처럼 만들어냈을 가능성도 있다. 영화는 그중 하나를 골라서 알려주지 않는다. 오히려 내가 흥미롭게 느낀 것은 **그때까지 계속 남자의 이야기를 의심하게 만들었던 호텔에서 마지막에는 두 사람이 실제로 떠나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그래서 마지막 장면을 보고 나면 앞에서 보았던 복도와 정원도 조금 다르게 느껴진다. 처음에는 그냥 이상하고 복잡한 배경이라고 생각했던 공간이 사실은 관객이 시간을 구분하지 못하게 만드는 데 꽤 큰 역할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내가 보고 있는 장면이 현재인지 과거인지 확실하지 않으니 남자의 이야기를 확인할 방법도 없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 영화의 마지막을 “남자의 기억이 진실이었다”라고 받아들이고 싶지는 않다. 오히려 **계속 말로만 존재하던 남자의 이야기가 마지막에 실제 일처럼 보이게 된 순간**에 더 가깝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것도 정답은 아니다. 이 영화에서는 내가 이렇게 생각하는 것 역시 하나의 해석일 뿐이다.
### 마치며
《지난해 마리앙바드에서》를 처음 봤을 때 내가 가장 궁금했던 것은 남자와 여자 중 누가 진실을 말하고 있는가였다. 그런데 지금 다시 생각해보면 그 질문에 답을 찾으려고 했던 것 자체가 이 영화의 재미였던 것 같다. 나는 계속 호텔의 복도와 정원을 보면서 남자의 기억을 확인하려고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공간들이 오히려 아무것도 확실하게 알려주지 않았다. 같은 곳을 보고 있는데도 언제의 일인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지금은 이 영화를 단순히 **“기억과 현실의 경계가 모호한 영화”**라고만 말하고 싶지는 않다. 나에게는 오히려 **기억을 확인하려고 할 때 우리가 의지하는 장소와 장면까지 믿을 수 없게 만든 영화**에 가깝다. 그리고 그 생각을 하고 나니 마지막에 두 사람이 떠나는 모습도 조금 다르게 보였다. 그것이 지난해 실제로 있었던 일을 증명하는 장면인지, 남자가 계속 이야기해 온 기억이 현실이 된 것인지는 여전히 알 수 없다. 아마 이 영화는 끝까지 그 답을 알려주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그게 전처럼 답답하지 않다. 오히려 영화를 다 보고 나서도 ‘그때 정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라는 생각을 계속하게 만드는 것. 나는 그게 《지난해 마리앙바드에서》가 내게 남긴 가장 이상한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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