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민속학

삼국, 고려, 조선의 풍수

by 하이델베르그 2024. 5. 3.

풍수 관련 이미지

 

서문

풍수학은 중국에서 수천 년 전에 시작되었다.  우리나라의 풍수는 중국으로부터의 영향을 받아 오늘에 이른다. 이는 지형과 환경의 자연적 흐름을 이해하고 이를 적절히 조정하여 인간의 삶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 데 중점을 둔다. 여기서는 삼국, 고려, 조선 시대의 풍수에 대해 각각 살펴보자. 

 

중국의 풍수

북반구 중위도 지역의 민족들의 경우 배산임수 · 남면산록 같은 입지 조건을 길하게 생각했다. 우리나라도 같은 풍수관을 가졌고 삼국 초기에는 이것이 더욱 발전하여 자체적인 풍수관을 형성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풍수지리의 확고한 이론체계는 중국으로부터 들어온 것은 확실하다. 중국도 언제 어떻게 구체적인 이론체계가 성립됐는지는 정확히 알 수는 없다. 하지만 중국은 전국시대 말엽부터 풍수지리의 이론이 구체적으로 확립된 것은 확실하다. 이는 고대의 천부지모사상(天父地母思想)과 음양론, 그리고 여기에 사신도(四神圖)로 대표되는 천문사상(天文思想)이 더해진 결과였다. 이 시기는 기원전 5, 4세기경으로 도참비술적(앞날의 길흉을 예언하는 술법)사상이 성행했던 시기였다. 하지만 한대(漢代)에 들어서면서 음양론이 본격적으로 상용되면서 풍수지리설이 자리를 확고히 하게 되었다. 남북조시대에는 더욱 성행하여 대가들도 많이 나오게 되는데 이때 집터를 보는 양택(陽宅) 위주의 풍수에 더해서 묘터인 음택(陰宅)이 등장한다. 그 뒤, 당 · 송 · 원 · 명 · 청 시대에도 유명한 풍수서와 풍수가가 많이 나오게 된다.

 

삼국시대의 풍수

삼국시대에 중국의 풍수지리 이론이 들어왔다고 확신할 수는 없다. 하지만 사신도신앙 · 음양오행설, 그리고 점상술(占相術) · 참위비기류(讖緯祕記類) 등이 들어와 당시 풍수지리와 유사한 형태의 이론을 따랐다는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고구려의 일화를 보자면 당시 유명한 음양가가 나라를 침공하였던 관구검(毌丘儉)의 무덤을 보고 무덤의 형상이 고독한 형상을 띤 흉격이라 앞으로 그의 가계가 큰 화를 당하게 될 것이라 예언했던 기록이 있다. 또한 선덕여왕이 여근곡(女根谷)이라는 산의 형태를 보고 백제의 매복군사를 발견하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신라시대 때는 제4대 탈해왕이 토함산에 올라 초사흗날 달처럼 생긴 지형을 보고 자신이 지낼 곳이라 생각하여 그곳을 지략으로 빼앗은 이야기도 있다. 고구려 · 백제의 고분벽화에 사신도를 발견할 수 있는 것도 이를 증명한다. 특히, 신라 원성왕 때에는 『청오경』이 수입되었다는 기록이 확실해 풍수지리가 도선(道詵) 이전에 들어온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도선은 당나라로부터 본격적으로 풍수사상을 받아들인 사람이다. 최치원(崔致遠)과 동시대 사람이었던 도선은 선문구산파(禪門九山派)의 하나인 동리산파(桐裏山派)의 개조 혜철(惠哲)로부터 허가를 받아 전라남도 광양의 옥룡사(玉龍寺)에서 독자적인 선문을 전하던 승려이다. 그가 중국인 일행으로부터 풍수지리를 직접적으로 전수를 받은 것은 아니었다지만 전반적으로 그의 이론을 받아들인 것은 확실해 보인다. 일행은 위도를 측량하고 역법을 정리하는 등 매우 이성적이고 실증적인 방법을 적용했는데 그의 영향을 크게 받은 도선의 풍수지리설도 이 같은 방법을 적극적으로 적용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도선과 그의 제자들은 오늘날의 인문지리학적 입장에 한 발 다가선 시각으로 한반도 땅의 경동지괴(傾東地塊)(경동으로 한쪽은 가파른 단층이 되고, 다른 쪽은 완만하게 기울어진 땅덩어리)를 파악하였는데 이는 우리나라 땅 구조의 가장 큰 특징이다. 또한 그는 고려개국의 실리적 바탕을 세워 수도의 위치가 동남방으로 치우친 경주보다는 중부지방이 좋겠다는 의견을 내놓기도 했다.

 

고려시대의 풍수

고려 태조 왕건(王建)은 나라를 건국할 때 선종과 도선류의 풍수지리설에 크게 영향을 받은 만큼 그에 대한 숭배는 대단했다. 이후 고려시대를 통틀어 풍수지리설은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태조의 「십훈요(十訓要」는 풍수지리 중시 사상의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다. 제1조에는 사원의 개창에 관련한 내용이고 제2조는 도선이 정해준 곳 아니면 어떠한 곳도 사찰을 세울 수 없다는 내용, 제5조는 서경(西京)을 귀하게 대접하라는 내용, 제8조는 국토를 순역(順逆)의 관점에서 파악하는 해석은 철저하게 풍수지리에 뿌리를 박고 있다. 이후 성종과 현종은 지속적으로 동경(東京), 즉 경주에 대해 관심을 가졌으며 문종 이후에는 남경(南京), 즉 서울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이 고려 말기까지 이어졌다. 묘청의 난에서 서경천도론은 극대화된다. 고려시대의 모든 역사적 사건은 모두 다 풍수지리설을 근간으로 하고 있다 해도 지나치지 않을 만큼 당시 풍수지리설의 영향력은 대단했다.

 

조선시대의 풍수

조선 태조 이성계(李成桂)도 당시 성행하던 도참사상과(앞날의 길흉을 예언하는 술법)과 풍수지리설에 큰 관심을 보였다. 나아가 그는 이를 정치기반을 확립하는데 이를 적절하게 이용하였다. 미처 나라의 이름을 새로 정하기도 전에 나라의 수도의 위치부터 생각할 정도였다 당시 수도 호보였던 한양(漢陽) · 모악(母岳) · 계룡산(鷄龍山) · 개경(開京) 등지의 풍수적 입지에 대한 논전은 지금도 주옥같은 기록으로 남아있다. 또 조선시대는 유교국가의 이념이 확고해지면서 풍수사상도 양기(陽基) 위주의 도읍풍수에서 음택 위주의 묘지풍수로 바뀌었다. 사회가 자리를 잡은 것은 물론 효(孝) 사상이 적극적으로 부각되면서 이 같은 전환을 맞게 되었다. 그러나 세종이나 성종 때까지는 양기풍수와 관련한 논란이 간혹 나오기도 했다. 북악산(北岳山)과 취운정(醉雲亭) 산줄기를 둘러싼 주산 논쟁과 명당수(明堂水)인 청계천(淸溪川)의 오염문제 등이 이것이다. 하지만 중기 이후에는 묘지나 가택 풍수와 같은 개인적 성격의 풍수가 대부분을 이루게 되어 사실에 바탕을 둔 진리탐구와 실질적인 이익을 주창한 실학자들에게 망국의 표본으로 강하게 배척당하게 된다. 반면 민중들은 이를 통해 자신들만의 세계관을 정립하기도 했다. 홍경래나 전봉준 등은 풍수사상에 기반하여 유 · 불 · 선 3교를 녹여내고 나아가 전통적 민족사상까지 아울러서 민중의 구심점을 마련하려 했다.

 

마치며

삼국, 고려, 조선 시대를  관통했던  우리나라의 풍수 사상에 대해 알아보았다. 현대에는 풍수가 미신이라며 배척받는 입장이기도 하지만 풍수의 심오한 개념이 현대 생활에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지에 대한 연구와 더불어 이를 통해 더 나은 환경과 삶의 방법을 찾는 것도 필요하다 하겠다.

.

'민속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상례  (0) 2024.05.03
삼국시대의 민간신앙  (0) 2024.05.03
민속춤  (1) 2024.05.03
무속의 사고체계  (0) 2024.05.03
전통놀이 – 남자들의 놀이와 마을 전체의 놀이  (0) 2024.05.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