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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속학

삼국시대의 민간신앙

by 하이델베르그 2024. 5. 3.

 

삼국시대 민간신앙 관련 이미지

서문

삼국시대의 민간신앙은 여러 외래 종교의 영향을 통해 형성되었다. 또한 이때는 천신, 용신, 동물신 등 다양한 신들이 나타났고 이에 얽힌 설화도 빼놓을 수 없다. 또한 악귀를 물리친다고 믿었던 장승이 등장한 시기이기도 하다.

 

다양한 신들의 등장

삼국시대에는 불교 · 도교 등 여러 외래종교가 들어왔다. 그러나 삼국시대 초기까지도 제정일치의 형태는 그대로 남아 있는 가운데 매우 다양한 신들이 등장했다. 성격을 규정하기 어려운 도깨비를 비롯하여 우상(偶像) · 역귀(疫鬼) · 자연신 · 동물신 · 식물신 · 왕신 · 장군신 등 많은 신들이 추앙되었다. 천신은 하늘과 큰 인물을 직접적으로 잇는 독특한 존재로 받아들여졌다. 33천왕인 제석천(帝釋天)의 아들이라고 여겨졌던 김유신은 사람으로 태어나 신라를 통일한 뒤 죽어서 다시 천신이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진평왕은 “상황(上皇)의 뜻에 따라 옥대(玉帶)를 내리노라”는 천사의 말을 듣고 즉위하였다. 또, 해와 달의 정령이었던 연오랑(延烏郎)과 세오녀(細烏女) 부부가 일본으로 건너가자 신라의 천지는 광명을 잃었다 한다. 이러한 기록들을 통해 천신 · 상황 · 일신 · 월신 · 천사 등 여러 신을 인정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산신을 숭상했던 백제와 신라는 산신에게 제사 지내기를 좋아했다. 백제에서는 부여풍(扶餘豊)이 신라의 김법민(金法敏)과 백마(白馬)를 잡아 맹서를 하기 전에 산곡(山谷)의 신에게 제사를 지냈다. 박제상(朴堤上)의 아내는 여산신(女山神)이 되었고 신라의 탈해왕은 동악신(東岳神)이 되어 문무왕의 꿈에 나타났다고 한다. 그리고 신라에서는 중국의 오악사상에 영향을 받은 산신제가 있었다. 오악(五岳) 즉, 동쪽의 토함산, 남쪽의 지리산, 서쪽의 계룡산, 북쪽의 태백산, 중앙의 부악(父岳) 또는 팔공산에 있다고 믿은 오악신들에게 제를 올렸다.

 

용에 대한 신앙

산신신앙과 함께 삼국시대에는 용에 대한 신앙이 강했다.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는 신라의 문무왕은 죽어 감포 앞바다의 수중릉에 안장되었는데 이는 용이 되어 왜구로부터 나라를 지키기 위함이었다 한다. 또, 헌강왕은 개운포(開雲浦)에서 갑작스런 운무(雲霧)로 길을 잃은 일이 있었는데 이는 용의 장난으로 인한 것이었다. 이에 왕이 용을 위한 사찰을 지으라고 말하자 조화를 멈춘 용은 일곱 왕자를 거느리고 나와 왕에게 인사를 드렸다. 특히 용의 일곱 왕자 중 한 아들인 처용(處容)을 왕에게 보내 보좌하게 하였다. 순정공(純貞公)과 그의 아내인 수로부인(水路夫人)은 함께 강릉에 갔다가 해룡에게 붙잡혀간 일도 있었다. 또한 남지(南池)의 지룡(池龍)과 사람인 그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백제의 무왕이라고 했다. 이는 신령스러운 존재인 용과 인간을 결합시키는 민간신앙의 한 유형이라고 볼 수 있다.

 

삼국유사 속 역신과 동물신

그 외 『삼국유사』 등에는 역신과 동물신, 기타 특별히 이름을 명확히 할 수 없는 신들이 등장한다. 병의 신인 역신은 처용의 설화에 나타나고 있다. 역신이 사람으로 분하며 뛰어난 미색이었던 처용의 처와 관계를 맺었으나 이를 본 처용은 태평한 태도를 보여 이에 오히려 역신이 감동하였다. 그 뒤부터 민간에서는 처용 부적이 생겨났는데 이는 역신을 쫓기 위함이었다 한다. 동물신은 여러 일화에 등장한다. 소지왕 때의 사금갑(射琴匣) 고사에는 까마귀 · 쥐 · 돼지 등의 신령스러운 동물들이 나온다. 그리고 원성왕 때의 김현(金現)이 흥륜사(興輪寺)에서 미녀를 만나 몸을 섞었는데 나중에 보니 알고 보니 호랑(虎娘)이었다. 진성여왕 때 뛰어난 궁수였던 거타지(居陀知)가 해룡의 청으로 고도(孤島)에 남아 있다가 괴신을 활로 쏘았는데 늙은 여우의 정령이었다는 것, 선덕여왕이 병들었을 때 밀교 승려 밀본(密本)이 『약사경』을 읽은 뒤 손에 쥐고 있던 석장(錫杖)(스님들이 가지고 다니는 지팡이)을 날려 보내니 늙은 여우가 마당에 쓰러져있었다는 이야기 등이다. 이를 통하여 볼 때 여우의 신인 호신(狐神)은 좋은 신이 아닌 악한 신으로 생각되었다. 이 밖에 잡신으로는 진지왕과 도화녀(桃花女)가 생전에 나누지 못한 한스러운 정으로 죽어서라도 이루어 낳은 자식인 비형(鼻荊), 선덕왕 때 어린 김양도(金良圖)를 벙어리로 만들어 버린 뒤에도 대귀(大鬼) · 소귀(小鬼)가 횡포를 부리는 설화 등은 도깨비 신앙의 모태가 되었다고도 보고 있다.

 

신라시대, 장승의 등장

신라 때에는 민간신앙에서 한 축을 차지하고 있는 장승이 등장했다.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산선원(雲門山禪院)에는 ‘장생’이 있었고, 운문산선원의 ‘장생표탑(長生標塔)’ 공문에 청도 경내에 장승 11개가 있다고 쓰여 있다. 이것으로 보아 당시에 장승은 사찰과 연계되어 있었고 그 수 또한 많았다 볼 수 있다. 또, 『삼국유사』에는 돌백사(堗白寺)와 백암사(伯巖寺)에 주첩(柱貼)이 있다고 하였다. 주첩은 오늘날의 사찰 입구나 민간에서 볼 수 있는 장승의 전신으로 보고 있다. 이들 장승은 경계의 표시, 거리표, 악을 막는 귀표(鬼標) 등의 역할을 했다. 사찰 입구에 세우는 것은 입구의 표시이면서 부정을 막아주는 역할이었다. 또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의 거리를 표시하는 거리표 역할도 했다. 촌락의 입구에 축귀대왕(逐鬼大王)이라고 쓰여 있는 장승은 부정을 쫒는 민간신앙적인 의미를 가진다. 신라시대에 있어서의 장승이나 주첩은 신성한 영역을 표시하고 나쁜 기운을 물리치는 축귀적 의미를 가지고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며, 목주(木柱) · 석주(石柱) · 입석(立石) 등이 재료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삼국 시대의 기우제

삼국시대에는 비를 기다리며 산천과 하늘에 제사를 올리는 기우제에 대한 기록이 있다. 고구려에서는 563년(평원왕 5) 큰 가뭄으로 인해 왕이 최소의 음식으로 근신하면서 산천에 기도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백제에서는 227년(구수왕 14) 3월에 큰 가뭄이, 4월에는 우박으로 농작물에 큰 피해가 있어 동명묘(東明廟)에 기우제를 올렸다. 신라에서는 753년(경덕왕 12) 큰 가뭄이 있자 내전에서 『금광명경(金光明經)』(나라를 보호하는 3대 경전 중 하나)을 강하며 단비를 기원했다. 이 밖에도 삼국시대에는 기우제에 관한 단편적인 기록들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당시의 기우제 의식이 어떤 식으로 치러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진평왕 때는 시장을 옮기고 용을 그려서 기우제를 지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이 있다. 이로 미루어 형상주술(形象呪術)이 사용하였으며 용신에게 비를 기원하는 것이 대표적인 방법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같은 삼국시대의 민간신앙은 오늘날까지도 이어져 오고 있다.

 

마치며

삼국시대의 민간신앙과 전통은 우리의 역사와 정체성을 깊이 있게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삼국시대는 이러한 민간신앙과 더불어 다양한 외래 종교의 유입과 함께 한국 문화의 풍부한 유산을 형성한 시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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