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속학

'아이를 유괴하는 저승차사', 사라진 아이들에 대한 부모의 원초적 공포

infodon44 2026. 1. 12. 17:07
반응형

서문

아이를 유괴하는 '저승차사', '잃어버린 자식'에 대한 부모의 슬픈 상상력인가? 어릴 적 우리는 할머니 무릎에 앉아 듣던 옛이야기 속 '저승차사'의 존재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였습니다. 이승과 저승의 경계를 넘나들며 죽은 자의 영혼을 데려가는 존재는, 특히 '아이가 사라지는 비극'과 엮이며 더욱 서늘한 그림자를 드리우곤 했죠. 설명할 수 없는 아이의 죽음이나 실종 앞에서 부모의 찢어지는 마음은, 과연 '저승차사가 아이를 유괴했다'는 슬픈 상상력을 빚어냈던 것일까요? 오늘은 이러한 민담 속에 숨겨진 부모의 깊은 상실감과 인간 본연의 애도 심리를 탐색하며, 시대와 문화를 넘어선 '잃어버린 자식'에 대한 우리 모두의 보편적인 애환을 조명해 봅니다.

 

1. '아이를 유괴하는 저승차사', 사라진 아이들에 대한 부모의 원초적 공포

아이의 죽음은 인류 역사상 가장 잔혹한 비극 중 하나였습니다. 현대 의학이 발달하기 전, 영유아 사망률이 높았던 시대에는 아이들이 이유 없이, 혹은 알 수 없는 질병으로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이하는 일이 비일비재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부모의 마음은 찢어지고, 남겨진 이들은 설명할 수 없는 상실감과 무기력함에 사로잡혔을 것입니다. 바로 이때 **'저승차사가 아이를 유괴했다'**는 서늘한 신화적 해석은 무수한 물음표와 공허함 속에서 하나의 '답'을 제시하곤 했습니다. 이처럼 '아이를 유괴하는 저승차사' 이야기는 고대인들이 겪었던 예측 불가능한 삶의 비극, 특히 어린 생명의 허망한 소멸 앞에서 느끼는 부모의 원초적 공포가 투영된 결과로 볼 수 있습니다. 미지의 존재에 의해 아이가 '데려가졌다'는 이야기는, 부모 스스로의 무력함이나 잘못 때문이 아니라는 일종의 정신적 방어 기제가 되기도 합니다. 질병이나 사고의 원인을 알 수 없을 때, '초자연적인 힘'에 그 책임을 돌림으로써 감당하기 어려운 현실의 고통과 무기력감을 조금이나마 덜어내려 했던 것입니다. 이 신화는 사랑하는 아이의 갑작스러운 부재를 어떻게든 이해하고 설명하려 했던 옛사람들의 처절한 노력이자, 통제할 수 없는 운명 앞에서 부여잡으려 했던 최소한의 위안이었습니다. 어릴 적 한강 근처에 살던 저는 비가 많이 와 한강물이 불어났던 날, 친한 친구가 그곳에서 어린 나이에 목숨을 잃었던 일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며칠 뒤 그 친구 아버지가 무당을 데리고 그곳에서 넋걷이 굿을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죽은 자의 넋을 건져서 다시 좋은 곳으로 보내주는 식의 굿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비록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방법은 아니지만, 그렇게라도 해서 넋을 좋은 곳으로 보내주었다고 믿어야 고통과 상실감이 조금이나마 덜어지는 것 같았다고 느껴집니다. 마치 친구의 죽음이 어떤 거대한 운명 속에 이미 정해져 있던 것처럼 생각하며, 불합리한 현실을 받아들이려 했던 경험이었습니다.

 

2. '잃어버린 자식'의 슬픔: 상실을 재해석하는 부모의 심리

**'잃어버린 자식'**이라는 표현은 단순히 물리적인 부재를 넘어, 부모의 삶 전체가 송두리째 흔들리는 심연과 같은 슬픔을 내포합니다. 이러한 거대한 상실 앞에서 인간의 마음은 종종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강력한 심리적 방어 기제를 작동시킵니다. '저승차사가 아이를 데려갔다'는 이야기는 바로 그러한 심리적 의식 중 하나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부모는 아이를 지키지 못했다는 엄청난 죄책감이나, 혹은 이해할 수 없는 우연의 비극 앞에서 오는 무기력감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 합니다. 유괴나 살인 같은 극단적인 사건이라면 명확한 '악당'이라도 존재하지만, 갑작스러운 병이나 사고로 인한 죽음은 탓할 대상을 찾기 어렵습니다. 이때 초자연적인 존재인 '저승차사'는 비극의 '주범' 역할을 대신 수행하며, 부모에게 죄책감이나 자책 대신 애도에 집중할 수 있는 심리적 공간을 제공합니다. 상상 속의 강력한 존재가 아이를 데려갔다는 이야기는, 부모가 현실의 무기력함 속에서 절망하는 대신, 아이가 어떤 '의미'를 가지고 다른 세계로 떠났다는 narrative를 만들어내는 역할을 합니다. 이 슬픈 상상력은 부모가 감당하기 어려운 상실을 재해석하고, 아이의 부재를 단순한 '소멸'이 아닌 '다음 세계로의 이동'으로 받아들임으로써,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어떻게든 애도의 과정을 이어갈 수 있도록 돕는 심리적 완충 장치가 되는 것입니다. 저는 꽤 오랫동안 키웠던 반려동물을 갑작스러운 사고로 잃었을 때, 한동안 너무 큰 죄책감과 슬픔에 시달렸습니다. 제가 조금만 더 주의했더라면, 제가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하는 생각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우리는 이미 서로 만날 때 하늘에서 정해준 인연의 시간이 정해져 있었다. 그리고 어떤 형태로든 그 인연을 다했기에 이제는 떠나간 것은 분명하다. 더 이상 아프지 않고 좋은 곳에 갔을 거야'라고 스스로에게 이야기해 주기 시작했습니다. 이 말이 진실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았지만, 그런 식으로 제 아픔을 달래야 제가 버틸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 상상 덕분에 강아지에 대한 애도를 이어갈 수 있었고, 극심한 죄책감에서 벗어나 슬픔을 오롯이 마주할 수도 있었습니다.

 

3. 상상력을 넘어: 애도와 치유로 향하는 공동체의 여정

'저승차사가 아이를 유괴했다'는 식의 이야기는 단순히 개인적인 상상력에 머물지 않고, 공동체 전체가 애도와 치유를 함께할 수 있는 문화적 토대를 제공합니다. 비록 슬픈 이야기일지라도, 이러한 신화는 비극적인 상실을 겪은 이웃의 아픔을 공동체가 함께 이해하고 공감하는 공통의 언어를 만들어줍니다. 즉, 마을 사람들이 함께 저승차사를 달래는 의식을 행하거나, 사라진 아이의 영혼을 위한 위령제를 지내는 등, 이 신화는 개인적인 슬픔을 넘어 집단적인 애도 의례와 위로의 방식을 이끌어냈을 것입니다. 이러한 공동체의 노력은 상실의 아픔을 겪는 부모에게 혼자가 아니라는 심리적 지지를 제공하며, 비극적인 사건 앞에서 분열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서로를 보듬는 연대의 중요성을 일깨웁니다. 현대에 와서는 '저승차사' 같은 초자연적 존재의 개입은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아이를 잃은 부모와 같은 깊은 상실감은 시대를 관통하는 보편적인 경험입니다. 이제 우리는 그 슬픔을 과거처럼 '신화적 상상력'으로 해석하기보다, 과학적 이해와 심리학적 애도 과정을 통해 치유하려 노력합니다. 그러나 그 과정의 본질은 여전히 같습니다. 홀로 감당할 수 없는 아픔 앞에서 공동체의 이해와 지지, 그리고 사랑하는 존재의 부재를 받아들이고 재구성하는 심리적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저는 아주 친했던 베스트 프렌드가 세상을 떠났을 때, 처음에는 혼자 모든 슬픔을 감당하려 했습니다. 아무에게도 무너진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한동안 너무나 힘들어서 정신과 상담을 받게 되었습니다. 의사 선생님께서 혼자서 애도하는 것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게 저의 슬픔을 이야기하고 함께 기억해달라고 부탁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후 친구들과 가족들에게 그 친구와의 추억을 나누고, 함께 슬퍼해달라고 부탁하니 마음이 훨씬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람은 누구나 태어나서 한 번은 흙으로 돌아가고, 누구나 죽는다는 것, 그리고 나 또한 머지않아 그 친구와 같은 편에 서게 된다는 사실을 가슴 깊이 받아들이려 노력했습니다. 그러면서 그 친구에게 매일 살아있는 동안 베스트 프렌드로 있어줘 고맙고 기억하겠다고 되뇌었습니다. 그런다고 슬픔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차츰 시간이 지나면서 그 친구와의 소중한 기억들이 슬픔 대신 조금씩 감사와 사랑으로 채워지는 것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마치며

상실의 그림자 속, 인간 본연의 애도와 희망 아이를 유괴하는 '저승차사' 이야기는 단순한 미신을 넘어, 설명할 수 없는 비극 앞에서 인간이 보여준 지극히 인간적인 반응, 즉 '잃어버린 자식'에 대한 부모의 슬픈 상상력이자 애도의 과정을 담고 있었습니다. 통제할 수 없는 죽음 앞에서 막연한 공포와 죄책감, 무기력함에 휩싸이지 않기 위해, 사람들은 슬픈 상상을 통해 한 줄기 설명을 찾고 마음의 균형을 유지하려 했습니다. 시간이 흐르고 과학이 발전하며 '저승차사'의 자리는 비었지만, 사랑하는 이를 잃은 슬픔은 여전히 인류의 보편적인 경험으로 남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슬픔의 형태나 설명의 방식이 아니라, 그러한 상실 앞에서 자신을 보호하고, 애도하며, 다시 살아갈 힘을 얻는 인간 본연의 회복 탄력성입니다. 이 슬픈 상상력은 결국 인간이 비극을 마주하는 방식과 치유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거울이었습니다.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슬픔의 그림자가 드리워질 때, 그것을 헤쳐나갈 자신만의 '이야기'와 '애도 의식'이 필요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