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
오늘은 고려시대의 무속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고대로부터도 안녕과 풍작을 기원하는 집단적인 제천의식이 치러졌으며 이는 일종의 농경의례 같은 것이었습니다. 신라시대에는 이것이 산천제나 기우제와 같은 형식으로 분화되었는데 이는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도 그대로 이어졌고 현재도 촌락제나 동제의 형식으로 남아있습니다. 이처럼 집단 무교제례는 그대로 오늘날 까지도 전해집니다.
고려시대의 개인 굿과 제의형태의 굿
고려시대에는 개인을 위한 굿이나 무당이 이끄는 제의의 형태가 구체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한 시기이다. 물론 개인의 안위를 목적으로 한 무격신앙(巫覡信仰)의 출발은 신라 말기부터 9세기말 헌강왕 때의 처용랑(處容郎) 전설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는 처용량이 노래와 춤으로써 열병대신을 물리쳐낸다는 내용으로 이것을 무당의 시조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후 100여 년이 지난 고려 초기까지 무당굿에 관한 기록은 없다. ≪고려사≫에 나타난 무 격에 대한 기록의 시작은 현종 12년(1021)부터이다. 이때 기우제를 위해 무당을 모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 뒤로 또다시 100여 년에 걸쳐 무격에 대한 기록이 없다가, 예종 16년(1121)에 비로소 무당을 다시 모아 기우제를 지냈다는 기사를 볼 수 있다. 이후로 무격과 관련한 기사는 빈번해진다.
이로써 고려 인종 때 이후로 우리나라에서 무속이 성행하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12세기 고려왕조가 침체와 혼란기로 접어들기 시작하면서 무속이 성행하였다. 당시 인종은 때로 무녀 300여 명을 불러들여 기우제를 올렸다고 한다. ≪고려사≫ 세가 편(世家篇) 인종 9년 8 월조를 보면 당시의 무속의 성행을 짐작할 수 있다. “일관이 알리기를 ‘근래에 무풍과 음사(淫祀)가 날로 창궐하니 청컨대 유사(有司)들로 하여금 무당의 무리를 멀리 추방하도록 하소서’ 하자 왕은 그 말이 맞다 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 뒤 1298년(충렬왕 24)에도 성 안에서 무격음사(서낭당·신집 등에 제사하는 것)가 날로 성하니 그들을 성 밖으로 내몰자고 대사국(大史局)에서 청원한 일이 있었다. 이로써 무격신앙은 고려 말까지도 계속 성행하였다 볼 수 있다. 나라에서 공공연히 국무당(國巫堂)을 만들고 별기은제(신라 때부터 조선 시대까지 명산대천에서 국가의 안정과 번영을 위해 드리던 산신제의 일종)를 올리기 위해 무당들을 불러들이던 무풍이 고려 말까지 성행하였던 것이다.
고려시대의 신내림
고려시대에도 신내림은 성별구천을 막론하고 누구라도 신이 내리면 이를 받을 수밖에 없었음을 입증하는 기사들을 찾아볼 수 있다. 그에게 신이 들어옴으로써 무당이 되는 것이다. 충렬왕 때 장성현(長城縣)의 한 무당은 “금성대왕(錦城大王)이 내게 실려 말하기를, ‘네가 신을 거부하면 내가 반드시 너의 부모를 살려두지 않으리라.’ 하므로 나는 어쩔 수 없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라고 한 기록이 ≪고려사≫에 전한다. 즉, 사람이 무당이 되는 것은 신이 내리고 무신의 강요에 어쩔 수 없이 무당이 된다는 것이다. 신이 내리는 데는 남녀·귀천이 따로 없다. 충선왕 때 내부령(內府令)을 지냈고 충숙왕 때에 찬성사(贊成事)가 된 강융(姜融)의 누이도 무당이 되어 송악사(松岳祠)에 기식하였다 한다. 공민왕 때 판숭경부사로 있었던 지윤(池奫)의 어머니도 신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한다. 남자에게 여자신이 내린 경우에 대한 기사도 있다. 명종 때 남자무당이 여장을 하고 사족들의 집을 찾아다니며 부녀자들과 문란한 행위를 일삼았다는 기사도 있다. 이는 모두 고려시대에도 남녀·귀천을 막론하고 신이 내리면 이를 거부할 수 없었던 사례를 입증하는 기사들이다.
고려시대 무당의 기능
고려시대 무당은 다양한 기능을 수행했는데 자세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사제적 성격
무당이 기우제에 관여했다는 많은 기사를 가장 많이 발견할 수 있다. 무당은 기우제를 주관하는 일종의 사제의 성격을 가졌다. 또 명종 이후 명산대천을 찾아 음주가무로써 왕실의 안락을 비는 제사인 별기은제를 주관하기도 했다. 이처럼 그들은 고대의 천군(天君)이나 아로(阿老)처럼 사제직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하겠다.
무의적 기능(巫醫的機能)
병을 치료하는 무의적 기능은 무당의 가장 보편적인 기능이었다. 병으로 위중하던 인종에게 점쟁이가 “이는 모반으로 처형된 이자겸(李資謙)의 원한 때문”이라 함으로써 그의 처자와 자손에게 보상하였고 다시 내시를 보내 김제군에 신축한 벽골지(碧骨池)의 둑을 헐게 하였다. 이는 모두 무당의 말에 따른 것이었다. 원한을 품고 죽은 자의 영혼이나 막힌 수로의 원한이 왕의 병의 원인이라고 믿고 그 한을 풀고 위로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러한 치병 행각은 왕실뿐 아니라 일반 서민들에게도 널리 퍼져 나갔다. 송나라의 서긍(徐兢)도 “고려는 원래 귀신을 약보다도 더 믿어 병에 걸려도 약을 먹지 않고 귀신에 의존하고 있다 ”라고 하였다.
예언적 기능
일어나지 않은 일을 미리 알려주는 예언적 기능인 예언 점복은 무당이 지닌 기본적 기능 중 하나였다. 의종 때 등주(登州)의 서낭신이 종종 무당에게 실려 국가의 앞날을 신기하게도 맞추었고, 공민왕 때도 신이 실린 무녀가 “지금 나라에는 요망스러운 일이 많이 벌어지고 있는데 이는 곧 망조를 의미한다”라고 하였다.
사령저주(使靈咀呪)
특히 고종 이후에는 사령저주라 하여 악령을 불러들여 남에게 해를 주고 병이 들게 하는 저주법이 성행하였다. 충렬왕·충선왕 때는 공주를 질투해 무당을 시켜 저주, 무고(巫蠱)했던 기록을 종종 찾아볼 수 있다.
가무의 기능
무교는 원래 신령을 맞을 때 노래와 춤이 가미되어 가무의 기능까지 더해진다. 이러한 가무가 점차 발전하여 무당의 중요한 기능의 한 축이 되었다.
<<동국이상국집>>에는 12세기경의 굿의 모습을 말해주는 한 편의 장시가 있다. 그 가운데는 굿하는 광경이 묘사되어 있는데 이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굿하는 장소는 신단이 있는 방 안이다. 벽에는 칠성님의 무신도와 모시는 신들의 그림이 모두 걸려 있었다. 신당에 모신 주신은 제석신이다. 굿하는 절차는 요란스러운 장구 소리에 맞춰 무당이 먼저 술 마시며 껑충껑충 뛰는 춤으로 시작되었다. 이후 노래와 춤을 통하여 신이 실린 후에 신탁을 전하는 공수가 나온다. 그 내용은 길흉화복을 점치고 그에 대한 비방을 내리는 일이었다. 굿당에는 남녀·귀천을 막론하고 많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들은 무당에게 금품을 바쳤다. 이로써, 고려시대 무당과 굿은 오늘날 볼 수 있는 무속과 별반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이는 이미 12세기경에 오늘날과 같은 굿의 형태가 정형화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자료이기도 하다.
마치며
고려시대의 무속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고려시대의 무속의 성행은 우리의 영적 전통과 문화에 많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무속에 대한 강력한 신앙과 이에 대한 탐구는 이 시대를 통해 우리에게도 깊은 통찰력을 제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