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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비아의 로렌스 (1962), 거대한 사막보다 먼저 보이는 것들

infodon44 2026. 7. 11.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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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mm 필름으로 촬영된 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의 압도적인 사막 전경과 지평선
“광활한 네푸드 사막을 홀로 건너가는 로렌스의 모습. 넓은 사막과 작은 인물이 대비된다.”

 

 

《아라비아의 로렌스》(1962)를 생각하면 보통 끝없이 펼쳐진 사막부터 떠오른다. 그런데 이 영화를 다시 보면 사막 그 자체보다 그 안에 놓인 사람을 보여주는 방법이 더 재미있다. 어떤 사람은 아주 멀리서 점처럼 나타나고, 어떤 순간에는 손가락 끝의 작은 불꽃이 거대한 사막으로 이어진다. 또 로렌스는 옷을 바꿔 입으면서 화면 안에서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보이기도 한다. 이 장면들은 서로 직접 연결되어 있지는 않다. 그래서 나는 이번에는 영화 전체를 하나의 의미로 묶기보다, 서로 다른 장면 세 개를 따로 놓고 보려고 한다.

 

## 1. 사람보다 먼저 보이는 것은 사막이다

알리 셰리프가 처음 등장하는 장면부터 이상하다. 사막 저편에 무엇인가가 보인다. 그런데 처음부터 그것이 사람이라는 것이 분명하지 않다. 아주 작은 점처럼 보이던 것이 조금씩 가까워지고, 마침내 말을 탄 사람의 모습이 드러난다. BFI의 영화 소개에서도 이 장면을 알리의 ‘신기루를 뚫고 들어오는 등장’으로 꼽고 있다. 당시 《Sight and Sound》의 리뷰 역시 사막의 신기루에서 검은 점으로 나타났다가 말을 탄 사람으로 변하는 장면을 영화의 인상적인 순간으로 지적했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알리의 첫 등장이 그의 얼굴이나 대사로 시작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먼저 사막을 본다. 그리고 그 사막 안에서 아주 작은 움직임을 발견한다. 이 순서가 꽤 중요해 보인다. 보통 새로운 인물이 나오면 얼굴을 보여주고, 누군지 알려주고, 그 사람이 무엇을 하는지 따라가게 만든다. 그런데 이 영화는 반대로 한다. 사람을 알아보기 전에 그 사람이 놓여 있는 공간부터 보여준다. 그래서 알리는 처음부터 사막의 일부처럼 느껴진다. 물론 실제로 사람이 사막의 일부가 된다는 뜻은 아니다. 화면에서 그렇게 보인다는 이야기다.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 곳에서 작은 점 하나가 점점 커지면서 긴장감을 만든다. 이 장면을 보고 나면 《아라비아의 로렌스》의 사막을 단순히 아름다운 배경으로만 보기는 어려워진다. 사람이 등장해도 사막의 크기가 먼저 느껴지기 때문이다.

 

## 2. 성냥 하나를 끄자 화면의 크기가 갑자기 달라진다

이번에는 아주 작은 장면으로 가보자. 로렌스가 성냥을 켠다. 잠시 불꽃이 타오르고, 그 불꽃을 끈다. 그리고 화면은 사막 위의 강한 태양으로 넘어간다. 이 장면은 편집자 앤 코츠가 데이비드 린과 작업하면서 만들어낸 것으로, 성냥불과 사막의 태양을 연결한 컷은 영화의 대표적인 편집 장면으로 남아 있다. 이 장면에서 내가 재미있다고 느끼는 것은 ‘불이 뜨겁다’는 단순한 의미가 아니다. **크기가 바뀐다.** 손가락 가까이에 있던 작은 불꽃이 갑자기 눈앞을 가득 채우는 사막의 태양으로 바뀐다. 영화가 몇 초 사이에 아주 가까운 곳에서 아주 먼 곳으로 뛰어간 셈이다. 그래서 이 장면을 보고 있으면 사막이 갑자기 더 크게 느껴진다. 그 전까지 화면 속에 있던 것은 성냥 하나뿐이었다. 그런데 그것을 끄는 순간 영화는 작은 불꽃과 비슷한 모양의 태양을 보여주면서 공간을 확 넓혀버린다. 나는 이런 장면이 《아라비아의 로렌스》를 단순히 ‘사막을 잘 찍은 영화’라고 말하기 어려운 이유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사막을 크게 보여주는 것만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작은 것을 보여준 뒤 그것을 이용해 큰 공간으로 넘어가는 방법**까지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때 로렌스는 말을 하지 않는다. 그의 생각을 설명하는 대사도 없다. 성냥 하나를 켜고 끄는 행동만 있을 뿐이다. 그런데 그 짧은 행동이 다음 화면의 크기까지 결정한다.

 

## 3. 흰 옷을 입은 로렌스는 이전과 같은 사람인데도 다르게 보인다

로렌스가 아랍식 복장을 입고 사막에 등장하는 모습은 이 영화에서 꽤 유명하다. BFI의 당시 리뷰도 로렌스가 새로운 아랍식 복장을 입고 사막에서 행동하는 장면을 중요한 볼거리 중 하나로 언급했다. 의상은 영화의 시대와 장소를 보여주는 역할만 하는 것이 아니라, 배우의 몸이 화면에서 어떻게 보이는지도 바꾼다. 《아라비아의 로렌스》의 의상은 Phyllis Dalton이 담당했다. 그런데 여기서는 ‘로렌스가 아랍인처럼 변했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그렇게 단순하게 볼 수 없는 장면들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더 눈여겨보게 되는 것은 **몸의 모양이 달라졌다는 것**이다. 군복을 입었을 때의 로렌스와 길게 늘어진 옷을 입은 로렌스는 같은 피터 오툴이 연기하지만 화면에서 움직이는 모습이 상당히 다르게 느껴진다. 옷이 몸에 딱 붙어 있을 때와 넓게 퍼지는 옷을 입었을 때는 걷거나 움직이는 동작 자체가 다르게 보인다. 특히 사막처럼 주변에 사람이 거의 없는 공간에서는 이런 차이가 더 크게 느껴진다. 넓은 옷자락이 바람에 움직이고, 사람이 걷는 방향에 따라 옷의 형태가 달라진다. 사람의 몸만 보는 것이 아니라 몸 주변에서 움직이는 것까지 함께 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로렌스의 흰 옷은 단순히 “멋있어 보이는 의상”이라고만 생각하기에는 아깝다. 화면 속에서 로렌스의 크기와 움직임을 바꾸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서 재미있는 점이 하나 더 있다. 앞의 알리 장면에서는 사람이 너무 작아서 사막에 묻혀 있었다. 그런데 로렌스가 흰 옷을 입고 사막을 움직일 때는 오히려 사람이 사막 위에서 눈에 잘 들어온다. **같은 사막인데 사람이 보이는 방식이 달라진다.** 나는 이 차이가 꽤 재미있었다.

 

## 세 장면을 한꺼번에 묶지 않아도 보이는 것

이 세 장면을 억지로 하나의 뜻으로 묶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알리는 사막의 크기 때문에 작아지고, 성냥불은 작은 화면에서 거대한 사막으로 넘어가게 만들며, 흰 옷을 입은 로렌스는 넓은 사막 안에서도 눈에 띄는 사람이 된다. 서로 다른 장면인데 결과적으로 한 가지는 분명해진다. 《아라비아의 로렌스》에서 사막은 그냥 뒤에 깔려 있는 풍경이 아니다. **사람의 크기와 움직임, 그리고 우리가 그 사람을 바라보는 방식까지 바꿔놓는 공간**이다. 그래서 다음에 이 영화를 다시 본다면 사막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만 볼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사막 안에서 사람이 얼마나 작게 보이는지, 작은 불꽃이 어떻게 거대한 태양으로 바뀌는지, 흰 옷을 입은 사람이 그 넓은 화면에서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한 번씩 따로 봐도 좋겠다. 그렇게 보고 나면 《아라비아의 로렌스》의 거대한 화면이 단순히 ‘크고 멋진 화면’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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