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처음 봤을 때 나는 블랑쉬가 답답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의 나이를 숨기고, 지나간 일을 감추고, 지금의 처지를 있는 그대로 말하지 않는다. 반대로 스탠리는 거칠고 불편하지만 적어도 자신이 원하는 것을 숨기지는 않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런데 다시 보면서 이상하게 눈에 들어온 것은 블랑쉬의 거짓말 자체가 아니었다. 그녀가 **자신의 모습을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보이게 할 것인지 계속 신경 쓴다는 것**이었다. 그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전등을 가리는 장면이다. 처음에는 단순히 늙어 보이는 것을 감추려는 행동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영화 속에서 블랑쉬가 빛을 피하는 모습을 다른 장면들과 함께 놓고 보니 조금 다른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단순히 나이를 숨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상황 자체를 견디지 못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이렇게 생각하고 나니 블랑쉬의 행동들이 조금 다르게 연결되기 시작했다.
### 1. 블랑쉬는 왜 전등부터 가렸을까
스텔라의 집에 도착한 블랑쉬는 자신이 머물게 될 공간을 보고 실망한다. 그런데 그 불편함을 그대로 드러내기보다는 옷과 말투를 통해 자신의 모습을 꾸민다. 낯선 집에서 자신이 어떤 사람으로 보일지를 계속 조절하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기억에 남는 행동이 종이 갓을 씌워 전등의 빛을 가리는 장면이다. 이 장면이 재미있는 것은 블랑쉬가 단순히 어두운 곳을 좋아하는 사람으로 그려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녀는 밝은 빛 아래에서 자신의 얼굴과 나이를 보여주는 것을 불편해한다. 그래서 빛을 부드럽게 만든다. 나는 처음에는 이것을 아주 단순하게 받아들였다. ‘나이가 들어 보이는 것이 싫은가 보다.’ 그런데 다시 보니 그보다 조금 더 복잡해 보였다. 블랑쉬는 자신이 보여주고 싶은 모습과 실제 모습을 계속 나누고 있었다. 어둡게 만든 방은 그 차이를 유지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그래서 스탠리가 전등을 다시 드러내려고 할 때 두 사람의 충돌이 더 선명해진다. 블랑쉬에게는 단순히 조명을 밝히는 행동이 아니다. 자신이 애써 만들어 놓은 모습을 다시 드러내는 행동처럼 느껴진다. 이렇게 보면 스탠리가 블랑쉬에게 불편한 이유도 조금 달라진다. 스탠리는 그녀가 만들어 놓은 분위기에 쉽게 속아 넘어가지 않는다. 그녀가 보여주는 모습보다 실제로 무엇을 가지고 왔는지, 어디에서 왔는지, 무슨 일을 했는지를 확인하려 한다.
### 2. 트렁크 안의 물건들은 스탠리에게 전혀 다른 의미였다
블랑쉬가 가져온 트렁크를 스탠리가 뒤지는 장면도 처음에는 단순히 무례한 행동처럼 보였다. 블랑쉬는 자신의 옷과 물건들을 보여주며 그것들을 설명한다. 그녀에게 그 물건들은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보여주는 장식처럼 보인다. 하지만 스탠리는 그 물건들을 다른 방식으로 바라본다. 값이 얼마나 되는지, 실제로 무엇인지 확인하려고 한다. 여기서 두 사람이 같은 물건을 전혀 다르게 보고 있다는 것이 흥미로웠다. 블랑쉬는 물건을 통해 자신의 이미지를 만든다. 스탠리는 그 이미지 뒤에 실제로 무엇이 있는지를 확인한다. 그래서 이 장면에서는 블랑쉬가 거짓말을 한다는 사실보다 **두 사람이 현실을 확인하는 방식이 처음부터 달랐다는 것**이 더 눈에 들어왔다. 블랑쉬는 말과 옷과 분위기로 자신을 설명한다. 스탠리는 물건을 직접 만지고 확인한다. 한 사람은 자신이 보여주고 싶은 모습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다른 한 사람은 그것이 실제로 무엇인지를 확인하려 한다. 그 차이는 두 사람이 가까워질수록 더 큰 충돌로 이어진다. 특히 스탠리가 블랑쉬의 과거를 캐묻기 시작하면서 그녀가 만들어 놓은 이야기는 하나씩 흔들린다. 그렇다고 스탠리의 방식이 옳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진실을 확인하는 것과 상대방의 약한 부분을 끝까지 파고드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 내가 스탠리를 단순히 ‘현실적인 사람’이라고 부르기 어려운 이유도 여기에 있다.
### 3. 포커 테이블에서는 다른 사람이 무너진다
영화에서 스탠리의 거친 성격을 가장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은 포커를 하던 밤이다. 술이 들어가고 분위기가 험악해지면서 스탠리는 폭력적인 모습을 보인다. 스텔라가 다치고 블랑쉬가 불안해하는 모습도 이어진다. 그런데 그 뒤에 스탠리가 밖에서 스텔라를 부르고, 스텔라가 결국 그에게 돌아가는 장면을 보면서 나는 처음과 다른 질문을 하게 됐다. ‘왜 스텔라는 저 사람에게 다시 가는 걸까?’ 처음에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이 장면을 블랑쉬의 시선만으로 판단하면 스텔라가 왜 스탠리를 떠나지 못하는지가 보이지 않는다. 스텔라에게 스탠리는 블랑쉬가 보는 사람과 다를 것이다. 둘 사이에는 함께 살아온 시간과 서로에게 느끼는 욕망이 있다. 물론 그렇다고 폭력적인 행동이 괜찮아지는 것은 아니다. 다만 영화는 스텔라가 한 사람을 바라보는 방식이 블랑쉬와 다르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 부분에서 블랑쉬가 더욱 고립되어 보였다. 블랑쉬는 스탠리를 위험한 사람으로 본다. 스텔라는 그와 다른 관계를 맺고 있다. 스탠리는 블랑쉬를 믿지 않는다. 세 사람은 같은 집에 있지만 같은 현실을 보고 있지 않다. 그래서 이 영화의 갈등은 단순히 ‘착한 블랑쉬와 나쁜 스탠리’의 대결로만 보기에는 조금 복잡하다.
### 4. 마지막에 남은 것은 블랑쉬의 말보다 의사의 손이었다
마지막 장면에 이르면 블랑쉬는 자신에게 다른 미래가 있는 것처럼 이야기한다. 자신을 데리러 올 사람이 있는 것처럼 말하고, 어디론가 떠날 것처럼 행동한다. 처음에는 또 현실을 피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의사가 손을 내밀고 블랑쉬가 그 손을 잡는 순간에는 앞의 장면들과 다른 감정이 들었다. 영화 내내 블랑쉬는 자신의 모습을 스스로 만들어내려고 했다. 나이를 감추고, 과거를 감추고, 자신이 처한 상황도 다른 모습으로 이야기했다. 그런데 마지막에는 자신을 설명할 힘조차 남지 않은 사람처럼 보인다. 나는 이 장면을 보면서 처음에 전등을 가리던 행동이 다시 떠올랐다. 하지만 두 장면은 똑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전등을 가릴 때의 블랑쉬에게는 아직 자신을 숨길 힘이 있었다. 자신이 어떤 모습으로 보일지를 직접 선택하려 했다. 반면 마지막에는 다른 사람이 내민 손을 잡고 그를 따라간다. 그 차이가 이 영화에서 가장 마음에 남았다. 블랑쉬가 현실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거짓말과 자기기만이 그녀 자신의 문제를 더 크게 만든 부분도 있다. 하지만 마지막 장면을 보고 나면 ‘왜 저렇게 행동했을까’라는 질문이 단순한 비난으로 끝나지 않는다. 처음에는 블랑쉬를 보며 ‘왜 현실을 인정하지 않을까?’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조금 다르게 생각한다. **현실을 인정하는 것과 현실을 견딜 수 있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블랑쉬는 현실을 몰랐던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알고 있는 현실을 그대로 바라보는 것을 견디지 못했던 사람처럼 보인다. 그래서 마지막에 의사의 손을 잡는 장면도 단순한 패배로만 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그녀가 끝까지 만들어내던 자신의 모습을 더 이상 유지할 수 없게 된 순간처럼 보였다. 물론 이것이 블랑쉬의 행동을 모두 정당화하는 것은 아니다. 그녀에게도 다른 사람을 속이고 상처 입힌 책임이 있다. 다만 그 책임을 인정하는 것과 한 사람을 처음부터 끝까지 비난하는 것은 다른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지금의 나는 이 영화를 보고 블랑쉬를 처음처럼 쉽게 판단하기가 어렵다. 처음에는 전등을 가리는 사람이 보였다. 다시 보니 그 전등 아래에서 **자신이 어떻게 보일지를 끝까지 붙잡으려 했던 사람**이 보였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그 빛을 스스로 조절할 힘마저 잃은 사람이 남는다. 아마 내가 이 영화를 다시 보면서 가장 달라진 부분도 그것이다. 블랑쉬의 거짓말을 없던 일로 만들 수는 없지만, 그 거짓말 뒤에 무엇이 있었는지를 한 번 더 바라보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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