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라쇼몽**을 처음 봤을 때 나는 누가 거짓말을 하는지 찾으려고 했다. 도적의 이야기가 나오고, 여자의 이야기가 나오고, 죽은 사무라이의 목소리까지 들리니 그중 하나가 진짜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다시 보면서 오히려 이상했던 것은 따로 있었다. 나는 등장인물의 말을 믿은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말한 사건을 실제 장면으로 본 뒤 그것을 사실처럼 받아들이고 있었다.** 라쇼몽은 한 사건에 대해 나무꾼, 도적, 여자, 죽은 사무라이가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한다. 중요한 것은 영화가 그들의 말을 화면 밖에서 설명으로만 전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각자의 이야기가 플래시백으로 펼쳐지면서 관객은 그 장면을 직접 보는 것처럼 따라간다. 나는 이 방식이 이 영화를 단순한 ‘진실 찾기’ 영화와 다르게 만든다고 느꼈다.
### 이야기를 들은 것이 아니라 장면을 봤다고 생각했다
도적의 증언이 시작되면 숲에서 실제로 일이 벌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여자의 이야기가 이어질 때도 마찬가지다. 같은 사건인데도 앞에서 본 장면과 전혀 다른 상황이 다시 펼쳐진다. 그때서야 나는 내가 영화를 볼 때 화면을 얼마나 쉽게 믿는지 생각하게 됐다. 보통 영화에서는 카메라가 보여주는 것이 사실이라는 전제가 크게 흔들리지 않는다. 그런데 라쇼몽에서는 그 화면마저 한 사람의 기억과 주장 안에 들어 있다. **내가 본 장면이라고 해서 반드시 사건의 진실을 본 것은 아닐 수 있는 것이다.** 더 재미있는 것은 등장인물들이 단순히 서로 다른 기억을 말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각각의 이야기는 자신이 어떤 사람으로 보이고 싶은지와도 연결되어 있다. 영화 연구에서도 네 증언이 각 화자의 자기 이미지에 맞게 왜곡되어 있다는 점이 중요한 특징으로 설명된다. 그래서 영화를 다시 보니 나는 인물들의 거짓말만 의심하게 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의 이야기를 너무 쉽게 믿었던 내 눈도 의심하게 됐다.**
### 숲을 지나갈수록 사건이 아니라 이야기가 늘어난다
나무꾼이 숲으로 들어가는 장면도 예전과 다르게 보였다. 카메라는 나무꾼을 따라 숲 속을 계속 움직인다. 햇빛이 나뭇잎 사이로 들어오고 카메라는 나무 사이를 빠르게 지나간다. 이 장면은 사건을 설명하는 데 꼭 필요한 장면은 아니다. 그런데도 상당히 길게 이어진다. 영화 연구에서는 이 움직임 자체가 관객을 사건의 중심으로 끌고 들어가는 중요한 영화적 경험으로 분석되기도 한다. 나는 이 장면을 보면서 처음에는 정말 진실에 가까워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숲 안으로 들어갈수록 이상하게도 진실은 가까워지지 않았다. 오히려 하나의 사건을 설명하는 이야기가 계속 늘어났다. 이게 라쇼몽의 묘한 점이었다. 처음에는 ‘무슨 일이 있었는가’라는 하나의 질문만 있었다. 그런데 사람들의 증언을 따라가면서 관객에게는 여러 개의 장면이 생긴다. 나는 그중 하나를 선택해서 진짜라고 믿고 싶어진다. 하지만 영화는 어느 장면에도 최종적인 확인을 붙여주지 않는다. 예전에 나도 가까운 사람과 같은 일을 겪고 서로 전혀 다르게 기억했던 적이 있다. 그때는 누가 무엇을 잘못 기억하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지금 다시 라쇼몽을 보니 그때의 나 역시 내가 기억하는 장면을 너무 당연하게 사실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됐다.
### 마지막에는 진실을 확인하는 대신 한 장면이 남는다
그래서 마지막에 나무꾼이 버려진 아기를 데려가겠다고 하는 장면이 더 눈에 들어왔다. 앞에서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계속 충돌했다. 누구의 말을 믿어야 하는지도 알 수 없다. 그런데 마지막에는 나무꾼이 아기를 안고 돌아가기로 한다. 그가 사건의 진실을 모두 밝혀낸 것도 아니고, 앞에서 벌어진 일의 답을 찾아낸 것도 아니다. 그저 눈앞에 있는 아기를 어떻게 할 것인지 선택한다. 영화에서는 이 행동과 함께 비가 그치기 시작한다. 처음 봤을 때는 이 장면을 ‘인간에게 아직 희망이 있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그런데 지금은 그보다 앞의 영화와 더 직접적으로 연결해서 보게 된다. 앞의 인물들은 자신이 본 사건을 이야기했다. 우리는 그 이야기를 보면서 어느 것이 진짜인지 판단하려 했다. 하지만 마지막의 나무꾼은 더 이상 자신의 이야기를 증명하려 하지 않는다. **그가 보여주는 것은 말이 아니라 행동이다.** 그래서 이 영화에서 내가 끝까지 기억하게 된 것은 결국 진실을 밝혀낸 장면이 아니었다. 진실을 알 수 없는 상황에서도 나무꾼이 실제로 무엇인가를 하는 장면이었다.
### 라쇼몽을 다시 보고 나서
이제 라쇼몽을 보면 나는 예전처럼 “그래서 누가 거짓말을 한 거지?”만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나는 왜 저 사람이 말한 장면을 진짜라고 믿었을까?”** 이 질문이 생기고 나니 영화 속 네 개의 이야기도 조금 다르게 보였다. 서로 다른 진실을 늘어놓은 영화라기보다, 한 사람이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줄 때 그 이야기가 어떻게 하나의 현실처럼 만들어지는지를 보여주는 영화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마지막의 나무꾼은 그 복잡한 이야기 바깥에서 말이 아닌 행동을 선택한다. 내가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 찾고 싶었던 것은 사건의 정답이었다. 다시 본 뒤에는 내가 무엇을 믿고 있었는지를 돌아보게 됐다. **라쇼몽이 오래 남는 이유는 진실을 알려주지 않아서가 아니라, 내가 진실을 본다고 생각하는 순간까지도 의심하게 만들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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