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
안개 자욱한 숲 속, 타오르는 욕망과 서늘한 배신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구로사와 아키라는 우리에게 '진실의 부재'라는 가혹한 선물을 던집니다. 1950년 작 <라쇼몽>은 단순한 영화를 넘어 인간 존재의 근원을 흔드는 철학적인 질문을 남깁니다. 류노스케 아쿠타가와의 짧은 단편 <덤불 속>을 원작으로 하고 『라쇼몽』의 배경을 빌려온 이 작품은, 단 하나의 사건을 네 개의 시선으로 바라보며 '객관적 사실'이라는 환상을 산산조각 냈습니다. 당시 패전 후 실의에 빠졌던 일본을 넘어 전 세계 영화계에 '모더니즘의 도래'를 선포했던 이 위대한 서사를, 한때는 진실을 기록하는 전장에서 함께했던 친구를 떠올리며 가장 묵직한 문장으로 해부해 보겠습니다.
1. 라쇼몽 효과와 주관적 진실: 인지 심리학과 실존주의의 만남
라쇼몽 효과와 주관적 진실이라는 개념은 단순히 기억의 오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세상을 인지할 때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자기중심적 편향(Egocentric Bias)'에 대한 학술적 고찰입니다. 영화 속 네 명의 증언자—도적 타조마루, 사무라이의 아내, 무당을 통해 빙의된 사무라이, 그리고 목격자 나무꾼—는 각자의 자존감과 사회적 지위를 지키기 위해 기억을 각기 다르게 재구성합니다. 학술적으로 이는 **'사후 확신 편향(Hindsight Bias)(결과론적 해석에 따라 과거의 기억을 재구성하는 이기적인 심리 기제) '**과 **'자기 고양적 편향(Self-serving Bias)(자신의 이익과 자존감을 위해 스스로를 긍정적으로 미화하고 정당화하려는 인지적 왜곡) '**이 결합된 형태입니다. 인물들은 각자 자신이 가장 도덕적이거나, 혹은 가장 강력한 존재로 기억되길 원하며 과거의 파편들을 재조립합니다. 이는 하이데거가 말한 '세계-내-존재'가 갖는 태생적 한계와 맞닿아 있습니다. 우리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나'라는 맥락을 통해서만 세상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영화가 보여주는 네 개의 진실은 모두 '진실'이면서 동시에 모두 '거짓'이 되는 기막힌 역설에 도달합니다. 1950년대 실존주의 철학이 풍미하던 시대적 배경 속에서, 이 작품은 "인간은 자기 자신조차 속이는 존재"라는 서늘한 선언을 던집니다. 편집장 친구와 함께 잡지를 만들던 시절, 우리는 같은 원고를 읽으면서도 전혀 다른 미래를 보았습니다. 저는 독자에게 전할 진심을 보았고, 친구는 잡지사의 생존과 숫자를 보았죠. <라쇼몽>의 인물들처럼 우리 역시 각자의 생존 방식에 따라 사건을 바라보았습니다. 같은 공간에 있었지만 우리는 서로 다른 '주관적 진실'의 덤불 속에 갇혀 있었던 겁니다. 그날의 결별은 누구의 잘못도 아닌, 서로의 렌즈가 달랐음을 인정하지 못한 데서 온 필연적 비극이었다고 생각되비다. 우리가 나눈 대화들조차 각자의 기억 속에서는 전혀 다른 의미로 남아있을 거라 생각하니, 인간의 소통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2. Rashomon(1950)의 영화적 서술 방식: 구로사와 아키라의 기술적 혁명과 빛의 미학
Rashomon(1950)의 영화적 서술 방식은 당대 영화 문법을 완전히 파괴한 혁명적인 시도였습니다. 촬영 감독 미야가와 카즈오는 당시 영화계의 불문율이었던 '태양을 향한 직접 촬영'을 감행하며 숲속의 명암 대비를 극대했습니다. 이는 단순한 시각적 효과를 넘어, 인간 내면의 '에토스(Ethos)(신뢰와 도덕)'와 '파토스(Pathos)(감정과 열정)'가 충돌하는 지점을 나타냈습니다. 빛은 진실을 밝히는 도구가 아니라, 오히려 눈을 멀게 하여 본질을 가리는 장애물로 작용합니다. 또한, 이 영화는 '볼레로(Bolero)' 형식(하나의 단순한 리듬과 선율이 반복되면서 악기 편성이 추가되어 점진적으로 웅장해지는 음악 구조로, 여기서는 동일 사건의 반복적 서술을 상징함) 의 변주를 음악에 도입하여 서사의 긴장감을 극대화니다. 동일한 사건이 반복될 때마다 미묘하게 변하는 선율은 각 증언자가 가진 욕망의 결을 대변합니다. 서사 구조 면에서는 '액자 소설(Frame Narrative)(하나의 이야기 속에 또 다른 이야기가 들어가 있는 구조) ' 형식을 취하면서도, 그 내부의 플래시백이 다시 거짓으로 판명되는 '신뢰할 수 없는 화자(Unreliable Narrator)' 기법을 전면에 내세웠습니다. 이러한 기법은 훗날 오슨 웰스의 <시민 케인>과 함께 현대 영화 서사 이론의 근간이 되었으며, 관객을 관찰자가 아닌 '배심원'의 위치로 끌어올리는 지적 유희를 가져옵니다. 숲이라는 공간은 이성적인 사회 질서가 무너진 '카를 융의 무의식'과도 같으며, 인물들은 그곳에서 가식의 가면을 벗고 원초적인 악의를 드러냅니다. 마치 구로사와의 카메라가 태양을 정면으로 쳐다보았듯, 저 역시 잡지사 시절의 그 열기를 정면으로 응시했습니다. 하지만 그 눈부신 열정 뒤에는 언제나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죠. 사무실의 형광등 아래에서 나눴던 대화들은 늘 명확해 보였지만, 퇴근길 어스름한 술집에서 나눴던 속마음은 늘 숲 속의 그림자처럼 모호했습니다. 구로사와가 빛과 어둠으로 진실의 양면성을 보여주었듯, 저와 친구 사이에도 말하지 못한 수많은 '그림자'가 있었습니다. 편집장의 권위라는 강렬한 조명과 동료라는 부드러운 그늘 사이에서 우리는 서로의 진심을 놓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카메라 앵글이 조금만 달랐어도 우리는 서로를 이해할 수 있었을까요? 지금도 가끔 서재의 오래된 잡지 창간호를 들여다봅니다. 그땐 그 친구의 얼굴만 봐도 진실을 안다고 믿었죠. 하지만 라쇼몽의 숲처럼, 우리가 나눈 수많은 기획안과 교정지들 사이에는 각자의 욕망이 잉크처럼 번져 있었다는 걸 이제야 알 것 같습니다. 진실은 종이 위에 박제되는 게 아니라, 읽는 이의 마음속에서 매번 새로 태어나는 것이니까요.
3. 객관적 사실의 부재와 영화사적 가치: 동양 미학이 서구 지성사에 던진 충격
객관적 사실이라는 것이 과연 실재하는가에 대한 의문은 이 영화를 단순한 미스터리물에서 형이상학적 의문으로 격상시킵니다. 1951년 베니스 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하며 일본 영화를 세계 무대에 데뷔시킨 <라쇼몽>은, 서구 중심의 선형적 서사 구조에 정면으로 도전했습니다. 서구적 관점에서의 진실이 '찾아야 할 정답'이라면, 구로사와가 제시한 진실은 '해체된 파편'이었습니다. 이는 포스트모더니즘이 대두되기 수십 년 전, 이미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 '거대 담론의 종말'을 예고한 사건이었습니다. 영화는 또한 '코러스(Chorus)' 역할을 하는 하급 관리와 승려를 등장시켜, 사건의 당사자가 아닌 제3자의 시선조차 오염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는 미셸 푸코가 말한 '권력과 지식의 관계'처럼, 보는 이의 위치에 따라 정보가 어떻게 권력화되고 왜곡되는지를 보여줍니다. 하지만 극의 후반부, 폭우가 쏟아지는 라쇼몽 성문 아래서 버려진 아기를 품에 안는 나무꾼의 행위는 '지식으로서의 진실'이 아닌 '실천으로서의 구원'을 제시합니다. 모든 진술이 거짓일지라도, 누군가를 돕겠다는 그 '찰나의 진심'만큼은 수단화 될 수 없는 실체라는 것입니다. 친구와 헤어지고 한참을 원망하며 '객관적 사실'을 찾아내려 애썼습니다. 누가 먼저 변심했는지, 누가 더 이기적이었는지 증거를 찾으려 했죠. 하지만 이 영화를 다시 보며 깨달았습니다. 진실 게임의 승자는 없다는 것을요. 중요한 건 우리가 함께 잡지를 만들며 세상을 조금 더 낫게 바꾸려 했던 그 뜨거운 '행동'의 흔적입니다. 나무꾼이 비난받을 과거를 가졌음에도 아기를 안아 들며 절망을 극복했듯, 저 역시 우리 사이의 갈등이라는 진흙탕에서 피어났던 열정만큼은 부정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것이 제가 이 과거의 숲을 빠져나가는 유일한 길이니까요. 누군가에게는 숭고한 희생이 누군가에게는 파괴적인 요구가 될 수 있고, 나의 최선이 타인의 영화 속에서는 비겁한 배신으로 기록될 수도 있습니다. 현실 속에는 고결한 순수도, 완벽한 악의도 없습니다. 그저 각자의 벼랑 끝에서 움켜쥔 비루한 입장들만이 안개처럼 뒤섞여 있을 뿐입니다. 내가 믿는 진실조차 거대한 미로 속 하나의 파편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겸손하게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제가 이 과거의 숲을 빠져나오는 유일한 길입니다.
마치며
<라쇼몽>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당신의 진실은 누구의 욕망을 대변하고 있느냐고 말이죠. 70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음에도 이 영화가 여전히 서슬 퍼런 생명력을 갖는 이유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각자의 '필터 버블'에 갇힌 현대인의 고독한 자화상을 예언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저는 이제 이 안개 자욱한 숲을 나갑니다. 오랜 시간 저를 괴롭혔던 기억들은 이제 한 편의 영화처럼 제 서재 한구석에 꽂아두겠습니다. 타인의 영화 속에 그려진 제 모습이 어떠하든, 그저 있는 그대로의 사실로 인정하고 나니 비로소 마음의 비가 그치는 기분입니다. 진실은 모호할지라도, 오늘 제가 꾹꾹 눌러 쓴 이 글의 진심만큼은 독자들에게 가장 확실한 '객관적 사실'로 전달되기를 소망해 봅니다.
'시네마 클래식'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시네마틱 리포트] <이브의 모든 것>: 권력의 전이와 욕망의 전위, 그 비극적 순환의 해부학 (0) | 2026.02.14 |
|---|---|
| [Masterpiece] 환상의 박제와 실존의 황혼: <선셋 대로>가 던지는 존재론적 질문 (1) | 2026.02.13 |
| 사랑은 덧없고 현실은 얄짤없다, 전후 도쿄의 잿더미에서 피어난 비정한 추적극 (0) | 2026.02.12 |
| [칼럼] <상속녀(1949)>, 빅토리아조 복식 미학에 투영된 가부장적 권력과 자아의 해체 (0) | 2026.02.11 |
| 그림자 속에 숨은 진실, 빈의 하수도에서 울려 퍼지는 치터의 선율 (0) | 2026.02.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