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네마 클래식

사랑은 덧없고 현실은 얄짤없다, 전후 도쿄의 잿더미에서 피어난 비정한 추적극

infodon44 2026. 2. 12. 2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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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습기 가득한 여름밤, 잃어버린 권총 한 자루를 찾아 헤매는 젊은 형사의 거친 숨소리는 시대를 넘어 우리에게 서늘한 질문을 던집니다.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1949년 작 **<들개(Stray Dog)>**는 단순히 범인을 쫓는 형사물의 틀을 넘어, 전쟁 직후 모든 가치관이 붕괴된 일본 사회의 바닥을 정직하게 보여주는 초기 걸작입니다. 사랑이나 연민 같은 사치스러운 감정이 들어설 틈 없는 그 얄짤없는 현실 속에서, 구로사와는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의 영향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소화해 내며 일본 영화 부활의 서막을 알렸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영화가 그려낸 비정한 리얼리즘의 심연을 학술적 시선과 저 자신의 개인적 경험을 교차하며, 왜 이 영화가 현대인들에게도 전율을 선사하는지 깊이 있게 들여다보고자 합니다.

 

1. 잃어버린 권총과 뒤바뀐 운명, 사랑은 덧없고 현실은 얄짤없다라는 명제의 증명

'사랑은 덧없고 현실은 얄짤없다'는 이 명제는 영화 <들개>의 서사를 관통하는 가장 핵심적인 철학적 기저입니다. 영화는 폭염이 쏟아지는 도쿄의 혼란 속에서 자신의 권총을 소매치기당한 초보 형사 무라카미의 시선을 집요하게 따라가며 시작됩니다. 학술적으로 이 작품은 전후 일본 사회의 '아노미(Anomie)' 현상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낸 작품으로 평가받습니다. 전쟁이라는 거대 서사가 끝난 뒤, 개인들은 도덕적 공백 상태에 놓이게 되었고, 여기서 권총이라는 '질서와 권력의 상징'을 분실한 행위는 단순한 실수를 넘어 주체성의 상실과 실존적 위기를 상징합니다. 당시 일본은 '도지 라인(Dodge Line)'이라 불리는 초긴축 정책으로 인해 극심한 경제난과 인플레이션에 허덕이고 있었습니다. 구로사와는 이러한 비정한 경제적 배경을 영화 속 '암시장'이라는 공간을 통해 보여줍니다. 무라카미 형사가 총을 찾기 위해 부랑자 거리를 헤매는 과정은 붕괴된 사회 시스템 속에서 개인이 얼마나 무력한지를 보여줍니다. 여기서 현실은 결코 자비롭지 않습니다. 그가 잃어버린 총은 범죄의 도구가 되어 무고한 피를 흘리게 하고, 무라카미는 그 죄책감이라는 늪에서 홀로 사투를 벌여야 합니다. 구로사와는 이를 통해 개인의 도덕성이 사회적 환경과 얼마나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는지를 고발하며, 생존을 위해 '들개'가 되어버린 인간들의 비극을 응시합니다. 영화 속 무라카미가 총을 찾기 위해 암시장의 밑바닥을 헤매는 장면을 보며, 문득 사회 속에 던져진 제가 느꼈던 깊은 고립감이 떠올랐습니다. 전화벨이 울릴 때마다 숨을 죽이며 타인의 냉담한 시선 앞에 서 있던 그 기분은, 영화 속 도쿄의 폭염만큼이나 숨 막히는 것이었습니다. 현실은 결코 '미안하다'는 말로 해결되지 않으며, 잃어버린 자존감은 결국 누구의 도움도 없이 나 스스로가 비정한 바닥을 훑으며 찾아내야 한다는 사실을 이 영화는 뼈아프게 가르쳐 주는 듯합니다. 그 누구도 나를 구원해 줄 수도 또 구원해주지도 않는다는 얄짤없는 현실의 민낯을 보았을 때, 비로소 타인에게 기대지 않고 홀로 서는 법을 배우게 되는 것이겠지요.

 

2. 아파트 옥상의 결투와 도플갱어 모티프, 전후 도쿄의 잿더미에서 피어난 비정한 연출

전후 도쿄의 잿더미라는 공간적 배경은 구로사와 아키라 특유의 '딥 포커스(Deep Focus)기법' ( 피사체와 배경 모두에 초점을 맞춰 화면 전체를 선명하게 보여주는 광각 렌즈 활용 기법)과 결합하여 관객에게 숨 막히는 현장감을 선사합니다. 감독은 형사 무라카미와 살인범 유사라는 인물을 통해 '도플갱어' 모티프를 정교하게 사용하며 인간 본성의 양면성을 심도 깊게 보여줍니다. 두 인물은 모두 전후 복원병이라는 공통된 배경을 가지고 있지만, 한 명은 법의 수호자가 되고 한 명은 사회의 낙오자가 된 살인자가 됩니다. 영화 중반, 무라카미가 범인의 흔적을 좇으며 마치 자기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듯한 고통을 느끼는 연출은 이 영화가 단순한 장르물을 넘어선 실존주의적 텍스트임을 증명합니다. 특히 영화 후반부, 아파트 옥상을 지나 숲 속 진흙탕에서 두 사람이 엉겨 붙어 싸우는 장면은 미학적으로나 학술적으로나 큰 의미를 갖습니다. 구로사와는 화려한 액션 대신, 땀과 진흙, 거친 숨소리를 강조하며 누가 선이고 누가 악인지 분간할 수 없는 모호함을 시각적으로 구현합니다. 이는 인간의 본질이 고결한 이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처한 환경과 생존 본능에 의해 결정될 수 있다는 '결정론적 리얼리즘'의 극치를 보여줍니다. 1940년대 후반 일본 영화계에서 이토록 감각적이고 본능적인 연출을 선보였다는 것은 그 자체로 일본 영화사의 기적과 같은 일입니다. 이는 훗날 수많은 누아르 영화의 시각적 교본이 되었습니다. 영화의 후반부, 무라카미 형사와 살인범 유사가 숲속 진흙탕 속에서 뒤엉켜 구르는 장면을 보며 저는 숨을 멈췄습니다. 그 속에서 누가 형사이고 살인자이고 누가 선이고 악일까요?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이 현실의 물리적 고통 앞에서는 얼마나 무력한 종이호랑이인지를 웅변하는 듯했습니다. 저 역시 생각합니다. 인간의 우아함이란 고결한 이념이 지켜주는 것이 아니라, 단지 운 좋게 배고프지 않게 태어난 환경이 유지해 주는 사치일 뿐이라고요. 이 장면은 저에게 '착한 사람'이라는 이분법적인 가식의 껍데기를 벗겨내고, 비정한 바닥에서 오직 생존을 위해 꿈틀대는 날것의 나 자신을 대면하게 했습니다. 그 지독한 정직함 끝에 남은 것은 허무가 아니라, 오히려 나 자신을 속이지 않아도 된다는 기이하고도 서늘한 해방감이었습니다.

 

3. 일본 영화의 부활과 네오리얼리즘, 비정한 추적극이 남긴 실존적 질문

비정한 추적극으로서 이 영화가 성취한 가장 큰 업적은 당시 전 세계를 휩쓸던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의 기법을 일본적 상황에 완벽하게 구사했다는 점입니다. 구로사와 아키라는 세트가 아닌 실제 도쿄의 거리와 실제 부랑자들을 카메라에 담으며, 패전 직후의 참담한 공기를 표현했습니다. 영화 속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폭염'과 '갈증'은 단순한 날씨 묘사가 아니라, 전후 일본인들이 느꼈던 실존적 갈등과 해소되지 않는 욕망을 상징하는 학술적 장치입니다. 영화는 살인범 유사에게도 그를 진심으로 기다리는 여인이 있었음을 보여주지만, 감독은 그녀의 사랑이 범죄와 파멸을 막는 데 아무런 힘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냉정하게 비춥니다. 여기서 영화는 우리가 흔히 믿는 '사랑의 구원'이라는 낭만적 신화를 보기 좋게 박살 냅니다. 현실은 기적을 허용하지 않으며, 감정적인 호소보다는 현실적인 인과법칙이 더 확실한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구로사와는 담담하게 보여줍니다. 영화의 결말에서 범인을 검거하고 난 뒤 무라카미가 짓는 그 허망한 표정은, 사랑도 도덕도 결국 인간이 만든 덧없는 장식품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웅변합니다. 이러한 냉소적인 시선은 역설적으로 우리에게 '가짜 희망'에 속지 말고 비정한 진실을 마주하라는 가장 강력한 실존적 위로를 건넵니다. 유사에게도 그를 기다리는 여인이 있었지만, 결국 사람들이 말하는 그 슬프리 만치 아름답다고 하는 사랑도 얄짤없고 잔인한 현실의 파도 앞에서는 덧없이 흩어지고 맙니다. 제가 예전에 경험했던 사랑의 기억들 역시, 시간이 지나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 덧없는 신기루와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사랑이 모든 것을 구원할 것이라는 환상을 버리고, 차가운 바닥을 딛고 서야만 비로소 인간은 자신의 삶을 있는 그대로 직시할 수 있습니다. 그 덧없음을 인정하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감정의 노예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유와 주체성을 얻게 되겠지요.

 

마치며

결국 구로사와 아키라의 <들개>가 우리에게 남기는 교훈은 세상의 본질이 결코 따뜻하거나 자비롭지 않다는 명확한 자각입니다. 사랑은 덧없고 현실은 얄짤없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 우리는 비로소 위선이라는 안개를 걷어내고 자신만의 길을 걸어갈 수 있습니다. 1949년에 쏘아 올린 이 비정한 신호탄은,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삶의 나침반이 되어줍니다. 우리가 괴로워하는 모든 이유는 어쩌면 덧없는 것에 영원을 걸고, 얄짤없는 현실에 요행을 바라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이 영화를 통해 우리는 그 비정한 진실과 마주할 용기를 얻으며, 일개 평범한 사람으로 살기에는 아까운 우리 자신만의 서사를 다시 쓰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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