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알프레드 히치콕의 〈사이코〉를 생각하면 대부분 샤워 장면을 먼저 떠올린다. 칼이 번쩍이고 마리온의 비명이 들리는 그 장면은 지금 봐도 강한 인상을 남긴다. 그런데 이 영화를 다시 보면 샤워 장면 못지않게 이상한 것이 하나 있다. 바로 노먼 베이츠의 어머니이다. 영화를 보는 동안 우리는 노먼의 어머니가 실제로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노먼은 어머니의 이야기를 하고, 어머니와 대화를 나누며, 어머니가 마리온에게 화를 냈다고 말한다. 관객은 노먼이 어머니에게 눌려 사는 아들이라고 받아들인다. 그런데 마지막에 가면 이 믿음 자체가 흔들린다. 어머니는 이미 죽었고, 우리가 계속 존재한다고 생각했던 ‘어머니’는 노먼 안에서 만들어진 인격이었다. 그래서 〈사이코〉의 반전은 단순히 범인의 정체가 밝혀지는 데 있지 않다. **관객이 영화 속에서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었던 한 사람의 존재 자체를 다시 해석하게 만든다는 데 있다.**
### 우리는 왜 노먼의 어머니가 실제로 있다고 믿었을까
노먼을 처음 만났을 때 그는 이상한 사람이기는 해도 당장 위험해 보이지 않는다. 그는 모텔에 온 마리온과 이야기를 나누고, 식사를 권하며, 자신의 어머니가 까다로운 사람이라고 설명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관객이 어머니를 직접 확인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노먼의 말을 크게 의심하지 않는다. 노먼이 어머니에 대해 이야기할 때 관객은 자연스럽게 그 설명을 하나의 사실처럼 받아들인다. 특히 노먼이 어머니를 두려워하면서도 보호하려는 모습을 보이기 때문에, 우리는 ‘아들이 어머니에게 지나치게 억압받고 있구나’라고 생각하게 된다. 히치콕은 어머니의 존재를 자세하게 보여주는 대신 **노먼의 말과 반응을 통해 어머니를 상상하게 만든다.** 이것이 재미있는 부분이다. 관객은 어머니를 제대로 본 적이 없는데도 이미 한 사람의 성격까지 만들어 놓는다. 엄격하고 질투가 많으며 노먼을 통제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영화가 만든 것은 어머니의 모습만이 아니다. **관객의 머릿속에 어머니라는 인물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 샤워 장면에서 우리가 믿었던 것이 다시 흔들린다
마리온이 모텔에서 죽는 장면도 처음에는 단순한 살인 장면처럼 보인다. 샤워 커튼 뒤에 사람이 나타나고, 칼을 휘두르는 모습이 빠르게 이어진다. 하지만 관객은 그 인물이 누구인지 명확하게 알지 못한다. 우리는 노먼이 말했던 어머니를 이미 알고 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그 살인을 어머니와 연결한다. 여기서 히치콕은 관객에게 범인의 모습을 자세히 보여주지 않는다. 빠르게 편집된 이미지와 소리, 실루엣만으로 누군가가 마리온을 공격했다는 사실을 전달한다. 관객은 빈 공간을 스스로 채운다. 그리고 그 빈 공간을 채우는 데에는 앞에서 들었던 노먼의 이야기가 사용된다. **“노먼에게는 어머니가 있다. 어머니는 매우 강하고 무서운 사람이다. 그러니 저 살인을 한 사람도 어머니일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생각하게 된다. 그런데 마지막에 이 생각이 무너진다. 어머니는 살인을 저지른 실제 인물이 아니었다. 관객이 보았다고 생각했던 ‘어머니’는 노먼이라는 한 사람 안에서 만들어진 존재였다. 그래서 샤워 장면은 마지막 반전을 알고 다시 보면 조금 다르게 보인다. 처음 볼 때는 ‘어머니가 마리온을 죽였다’고 생각했던 장면이지만, 다시 보면 영화가 우리에게 **그렇게 믿도록 정보를 배치했다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 마지막의 노먼은 범인보다 ‘우리가 믿었던 어머니’를 다시 보게 만든다
영화 마지막에 노먼의 얼굴과 어머니의 모습이 겹쳐지는 순간은 범인의 정체를 설명하는 장면이면서 동시에 지금까지의 장면을 다시 읽게 만드는 장면이다. 노먼은 어머니의 옷과 가발을 쓰고 어머니의 목소리로 말한다. 이제 관객은 어머니가 별개의 인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그런데 그 순간부터 영화 속에서 이전에 들었던 어머니의 말과 노먼의 행동도 전혀 다르게 보이기 시작한다. 나는 이 부분이 〈사이코〉의 가장 무서운 지점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영화가 끝나기 전까지 노먼과 어머니를 두 사람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사실은 하나의 사람 안에서 만들어진 두 존재였다. 따라서 반전은 단순히 ‘누가 살인자인가’를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관객이 앞에서 보았던 장면의 의미를 거꾸로 바꾸어 버린다.** 나 역시 오랫동안 다른 사람의 목소리를 먼저 의식하며 살아온 경험이 있어서인지, 이 설정이 다른 공포영화보다 오래 남았다. 물론 노먼의 행동과 나의 경험을 비교할 수는 없다. 내가 생각하는 것은 훨씬 일상적인 수준의 이야기다. 다른 사람의 판단을 너무 오래 의식하다 보면 어느 순간 그 사람이 실제로 옆에 없어도 그 목소리를 먼저 떠올릴 때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 경험을 떠올리면 노먼의 어머니가 더욱 이상하게 느껴진다. 영화 속에서 어머니는 죽었지만 노먼에게는 계속 존재한다. 결국 노먼에게 가장 강력한 사람은 현실에 있는 어머니가 아니라 **자기 안에 남아 버린 어머니의 목소리**였던 셈이다. 그래서 〈사이코〉의 마지막을 보고 나면 샤워 장면도 다시 생각하게 된다. 칼날이 얼마나 무서웠는지가 아니라, 우리가 얼마나 쉽게 영화가 만들어 놓은 존재를 실제 인물이라고 믿어버렸는지가 더 흥미롭게 느껴진다. 〈사이코〉는 관객에게 처음부터 모든 것을 숨기는 영화가 아니다. 오히려 관객이 노먼의 말을 믿고, 어머니라는 존재를 스스로 만들어 가도록 한다. 그리고 마지막에 그 믿음을 뒤집는다. 그래서 이 영화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어쩌면 칼이 아닐지도 모른다. **화면에 제대로 모습을 드러내지도 않은 사람이 관객의 머릿속에서는 너무나 분명한 존재가 되어 버리는 것.** 나는 〈사이코〉를 다시 볼수록 그 점이 더 섬뜩하게 느껴진다. 히치콕은 단순히 범인을 숨긴 것이 아니라, **관객이 스스로 한 사람의 존재를 만들어 믿게 만든 뒤 마지막 순간 그 존재가 사실은 어디에도 없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래서 영화가 끝난 뒤에도 노먼의 어머니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이제 우리는 그녀가 실제로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 사실을 알고 나서야, 영화가 우리의 머릿속에 얼마나 강하게 한 사람을 만들어 놓았는지를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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