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잉마르 베리만의 〈제7의 봉인〉(1957)을 보고 나면 보통 죽음과 체스를 두는 기사의 모습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나도 그랬다. 검은 옷을 입은 죽음과 체스를 두는 장면은 너무 강해서 다른 장면이 그 주변으로 밀려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 보니 이상했다. 영화에서 안토니우스 블로크가 그렇게 집요하게 찾는 것은 사실 ‘죽음을 피하는 방법’만은 아니었다. 그는 계속 신에게 답을 요구한다. 신은 존재하는가, 내가 왜 여기 있는가, 내가 믿어 온 것은 무엇인가. 그런데 베리만은 그 질문에 관객이 기대할 만한 답을 주지 않는다. 나는 오히려 이것이 이 영화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이라고 생각하게 됐다. **블로크가 답을 찾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영화 자체가 관객에게 답을 쉽게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 죽음과 체스를 두는 사람은 무엇을 알고 싶어 했을까
십자군 전쟁에서 돌아온 블로크 앞에 죽음이 나타난다. 블로크는 죽음을 보자 체스를 제안한다. 처음에는 단순히 죽음을 피하기 위해 시간을 벌려는 행동처럼 보인다. 실제로 체스가 계속되는 동안 블로크는 살아 있을 수 있다. 그런데 그가 체스를 두는 모습을 보면 이상한 점이 있다. 블로크는 이기기 위해서만 게임을 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계속 생각하고 질문한다. 자신이 살아온 시간에 어떤 의미가 있었는지 확인하려는 사람처럼 보인다. 그래서 체스판이 단순한 생존을 위한 도구처럼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죽음이 가까이 왔을 때에도 인간이 무언가를 이해하려고 붙잡는 마지막 공간**처럼 보였다. 하지만 영화는 블로크가 원하는 답을 알려주지 않는다. 신이 있는지 없는지도 확실하게 말하지 않는다. 블로크가 죽음을 이길 수 있는지도 말하지 않는다. 그래서 관객은 블로크와 비슷한 위치에 놓인다. 질문은 있는데 정답은 없다.
### 그런데 블로크가 질문하는 동안 전혀 다른 사람들이 살아간다
이 영화가 단순히 블로크의 종교적 고민만 다뤘다면 훨씬 무거운 영화가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요프와 미아가 등장한다. 두 사람은 블로크처럼 신의 존재를 증명하려 하지 않는다. 미아는 아이와 함께 있고, 딸기와 우유를 먹으며 평범한 시간을 보낸다. 요프는 자신이 본 것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그의 이야기는 블로크의 진지한 질문과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간다. 처음에는 이 장면들이 영화의 무거움을 덜어주는 휴식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다시 보니 오히려 이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블로크의 질문이 더 선명해졌다. 블로크는 삶의 의미를 알아내려고 하는데, 미아는 그 의미를 설명하지 않은 채 살아간다. 그렇다고 베리만이 미아를 통해 “질문하지 말고 그냥 살아라”라고 말하는 것도 아니다. 그런 판단을 내릴 만한 답을 영화가 주지 않기 때문이다. 미아의 평범한 하루도 하나의 가능성이고, 블로크의 끊임없는 질문도 하나의 가능성이다. 영화는 둘 중 하나를 정답으로 선택하지 않는다.
### 가장 이상했던 것은 블로크가 신에게 직접 말을 거는 장면이었다
블로크가 고해성사를 하러 간 장면에서 이 영화의 질문 방식이 더 분명해진다. 블로크는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이야기한다. 신이 자신의 곁에 존재하는지 알고 싶어 한다. 그런데 그가 신에게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는 순간, 실제로는 죽음이 그 이야기를 듣고 있다. 이 장면은 조금 우습기도 하다. 블로크는 자신이 누구에게 이야기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런데 이 장면을 생각해 보면 영화가 블로크에게 얼마나 잔인한지를 알 수 있다. 그는 진심으로 답을 원한다. 그런데 관객은 그가 원하는 답을 이미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베리만은 여기서 신이 나타나 블로크의 질문에 답하도록 만들지 않는다. 대신 **질문하는 인간의 모습 자체를 오래 바라본다.** 나는 이 부분에서 영화가 종교에 대한 답을 제시하는 작품이라기보다, 답을 원하지만 답을 확인할 방법이 없는 인간의 모습을 바라보는 작품처럼 느껴졌다.
### 마지막 행렬에서도 질문은 해결되지 않는다
마지막에 죽음은 다시 나타난다. 블로크와 다른 인물들은 죽음과 함께 언덕을 넘어가는 행렬을 이룬다. 죽음과 체스를 두면서 시간을 벌었던 블로크도 결국 그 행렬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 그렇다고 이것을 단순히 “죽음은 누구도 피할 수 없다”는 결론으로 끝내면 너무 간단해진다. 블로크가 체스를 둔 시간이 아무 의미가 없었다고 말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는 끝까지 질문했다. 답을 얻지는 못했지만 질문을 포기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영화 역시 블로크 대신 답을 만들어 주지 않았다. 나는 이것이 〈제7의 봉인〉을 지금까지도 생각하게 만드는 이유라고 느낀다. 영화가 “신은 있다”거나 “신은 없다”고 정리해 버렸다면 관객은 그 답을 받아들이고 영화를 끝낼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마지막까지도 질문이 남는다. 그래서 관객은 블로크가 죽은 뒤에도 블로크와 비슷한 자리에 남는다. **무엇이 정답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영화를 끝내야 하는 것이다.** 처음에는 그것이 영화의 불친절함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지금은 오히려 그 점이 이 영화의 가장 독특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제7의 봉인〉은 죽음에 관한 답을 알려주는 영화가 아니라, **답을 원한다는 인간의 욕구 자체를 끝까지 놓아주지 않는 영화**처럼 보인다. 블로크는 체스를 두면서 시간을 벌었다. 요프와 미아는 아이와 함께 평범한 시간을 보냈다. 다른 사람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죽음과 삶을 받아들인다. 누가 옳은지는 영화가 결정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 영화를 보고 난 뒤에도 질문이 남는다. 죽음을 이해하는 것과 삶을 살아가는 것은 같은 일일까. 나는 이제 〈제7의 봉인〉의 가장 강렬한 장면을 죽음과 체스를 두는 장면 하나로만 기억하지 않는다. 오히려 **끝까지 답하지 않는 영화 전체의 태도**가 더 오래 남는다. 블로크가 원했던 것은 어쩌면 정답 하나였을 것이다. 하지만 베리만이 관객에게 남긴 것은 정답이 아니라 질문이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나는 그 질문이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 있는 것이 이 영화에는 더 잘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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