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십계〉(1956)를 다시 생각하면서 뜻밖에 자꾸 떠오른 장면이 하나 있었다. 홍해가 갈라지는 장면이 아니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내려왔을 때 사람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은 장면이었다. 처음 영화를 봤을 때는 그 장면을 보며 사람들의 행동이 답답하게 느껴졌다. 모세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금송아지를 만들다니, 그동안 자신들이 겪은 일을 벌써 잊어버린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장면을 조금 다르게 생각하게 됐다. 모세가 사라진 뒤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는 동안 **그들에게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모세가 언제 돌아올지도 알 수 없었다. 반면 금송아지는 눈앞에 있었다. 직접 만들었고, 직접 볼 수 있었다. 이 차이를 생각하다 보니 영화의 앞부분까지 다시 보게 됐다.
### 모세가 왕궁을 떠나는 장면에서 먼저 달라진 것이 있었다
모세는 자신이 히브리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뒤 왕궁에서의 삶을 버리고 떠난다. 이 장면을 예전에는 모세가 자신의 진짜 정체를 깨닫는 장면 정도로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보니 더 중요한 것은 **모세가 더 이상 자신이 알고 있던 삶을 그대로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그에게 왕궁은 눈앞에 있는 현실이었다. 지위도 있었고, 가족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도 있었다. 반대로 자신이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는 분명하게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모세는 보이지 않는 쪽을 선택한다. 이것은 뒤의 금송아지 장면과 묘하게 대비된다. 모세는 눈앞에 있는 삶을 포기하면서까지 자신이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을 받아들인다. 반대로 금송아지를 만든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모세를 기다리는 대신 눈앞에 있는 대상을 붙잡는다. 처음부터 두 장면을 연결해서 만든 이야기는 아니겠지만, 다시 보니 두 장면이 서로를 비추는 것처럼 느껴졌다.
### 홍해에서는 왜 아무도 먼저 움직이지 못했을까
그래서 홍해 장면도 예전과 조금 다르게 보였다. 바다가 갈라지는 순간은 워낙 유명하다. 하지만 이번에는 물이 갈라진 뒤보다 **갈라지기 전의 사람들**을 생각했다. 앞에는 바다가 있고 뒤에서는 이집트 군대가 다가온다. 사람들 입장에서는 어느 쪽도 선택하기 어렵다. 모세가 무엇을 할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우리는 이미 영화의 결말을 알고 있다. 그래서 홍해가 곧 갈라질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장면을 바라본다. 하지만 영화 속 사람들에게는 그런 정보가 없다. 이 차이가 생각보다 컸다. 모세 역시 결과를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닐 것이다. 적어도 영화 속에서 그가 바다가 어떻게 될 것인지 미리 확인하고 움직이는 사람처럼 묘사되지는 않는다. 그는 두려운 상황에서 사람들 앞에 서 있다. 그러고 보면 〈십계〉에서 모세의 역할은 단순히 기적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아무것도 확실하지 않은 순간에도 먼저 서 있어야 하는 사람**이라는 점이 더 크게 보인다.
### 그런데 금송아지는 ‘기다리지 못한 사람들’만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여기서 다시 금송아지 장면으로 돌아오게 된다. 모세가 산에 올라간 뒤 시간이 흐른다. 처음에는 기다렸을 것이다. 하지만 기다림이 길어질수록 사람들의 마음은 흔들린다. 결국 그들은 금을 모아 금송아지를 만든다. 예전에는 이 장면을 믿음의 배신이라는 말로 쉽게 정리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단순하게 보이지 않는다. 그들이 만든 금송아지는 **기다림을 끝내기 위해 만들어낸 무언가**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모세는 보이지 않는다. 언제 돌아올지도 모른다. 자신들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확실하지 않다. 그런데 금송아지는 눈앞에 있다. 적어도 그것은 기다릴 필요가 없다. 그래서 금송아지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모습이 오히려 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사람은 아무것도 확실하지 않은 상태를 오래 견디기 어려울 때가 있다. 결과를 확인하고 싶고, 무언가를 붙잡고 싶어진다. 그것이 실제로 옳은 답인지보다 **답이 있다는 느낌 자체**가 필요할 때도 있다. 이렇게 생각하니 금송아지는 단순히 신앙을 버린 사람들이 만든 우상으로만 보이지 않았다. 그 장면에서 내가 보게 된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을 기다리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가** 하는 것이었다.
### 모세가 내려왔는데도 이미 달라져 있었다
모세가 산에서 내려와 금송아지를 발견하는 순간에는 이상한 느낌이 든다. 사람들이 기다리던 사람이 결국 돌아왔다. 그런데 너무 늦었다. 모세가 돌아왔다는 사실만으로 사람들이 그동안 한 선택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미 금송아지는 만들어졌고, 사람들은 그 앞에서 행동했다. 나는 이 장면 때문에 오히려 모세를 전지전능한 영웅처럼 보기가 어려워졌다. 홍해 앞에서는 그가 사람들을 이끌 수 있었다. 하지만 금송아지 앞에서는 사람들의 마음을 대신 선택할 수 없다. 이것이 〈십계〉에서 이번에 내가 발견한 가장 묘한 부분이다. 영화에는 바다가 갈라지는 엄청난 기적이 나오는데, 정작 사람의 마음을 바꾸는 일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바다는 모세의 앞에서 갈라졌지만 사람들의 불안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지금 내 기억 속의 〈십계〉에는 홍해와 금송아지가 함께 남아 있다. 하나는 **눈앞에 길이 생기는 장면**이고, 다른 하나는 **길이 보이지 않을 때 사람이 스스로 무언가를 만들어 버리는 장면**이다. 예전에는 당연히 홍해가 이 영화의 가장 강렬한 장면이라고 생각했다. 지금도 그 장면이 대단하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다만 영화를 다시 생각하고 나니 오히려 금송아지가 더 오래 남는다. 기적은 한순간에 일어나지만, 그 기적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마음은 그렇게 쉽게 움직이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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