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네마 클래식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1966)〉: 환상이 무너진 자리, 관계의 바닥을 묻다

infodon44 2026. 9. 11. 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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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의 술자리 분위기를 연상시키는 술잔

 

 

 

서론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를 처음 보고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참 피곤하고 지독한 부부다'라는 것이었다. 조지와 마사는 만나기만 하면 상대의 뼈를 정확하게 조각내고, 급소를 후벼 파는 데 진심이다. 그런데 영화를 묵묵히 지켜보다 보면, 이들이 단순히 서로를 미워해서 물어뜯는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된다. 너무 오랜 세월을 한 몸처럼 얽혀 살다 보니 서로의 약점 아닌 게 없고, 치부 아닌 게 없는 사이가 된 것이다. 나는 이 영화를 보며 문득 내 삶을 돌아보게 되었다. 나는 비록 결혼이라는 제도를 거치지 않았지만, 내 주변의 인간관계를 돌아보면 이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걸 느낀다. 평생을 갈 줄 알았던 오랜 친구, 가끔 던지는 은근한 비꼼과 막말 속에서도 기이하게 45년이라는 세월을 꾸역꾸역 이어온 관계가 그렇다. 또, 언젠가 돈 문제로 깊은 상처를 주고받으며 끝내 돌아섰던 그 지과의 관계를 떠올려본다. 그 관계들의 밑바닥을 들춰보면, 우리 역시 서로에 대한 일종의 '환상'을 품고 버텨왔던 게 아니었을까. 조지와 마사의 악다구니가 결코 남의 일처럼 느껴지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1. 중년 부부의 심리적 파멸은 이미 오래전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이들의 파멸은 영화가 시작되면서 비로소 점화된 게 아니다. 이미 수십 년이라는 세월 동안 조용히 썩어 문드러지고 있었다. 대학 교수인 남편 조지와 총장의 딸인 아내 마사는 심야의 파티가 끝나고 돌아와서도 서로를 향한 독설을 멈추지 않는다. 마사는 남편의 무능함을 신나게 난도질하고, 조지는 점잖은 척하면서도 마사의 아픈 곳을 정확히 받아 친다. 마사가 젊은 교수 닉과 그의 아내 허니를 집으로 끌어들이는 순간부터 거실의 공기는 살얼음판이 된다. 마사는 남편의 자존심을 관중 앞에서 갈기갈기 찢어놓을 구경꾼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 꼴을 보며 처음엔 조지가 답답했다. 왜 저렇게까지 당하고만 있을까 싶었다. 하지만 영화를 볼수록 조지 역시 마사를 무너뜨릴 비수를 누구보다 잘 쥐고 있는 사냥꾼이라는 걸 알게 된다. 내 오랜 친구 중에도 만나면 은근히 사람을 깎아내리며 기묘한 우월감을 즐기는 이가 있었다. 그 막말과 비꼼 속에서도 어떻게 45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을까 생각해 보면, 우리 사이에도 서로를 향한 기묘한 의존과 닳고 닳은 환상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조지와 마사처럼, 우리는 서로에게 가장 익숙하면서 동시에 가장 위험한 존재였다.

 

2. 술에 취한 네 사람이 벌이는 이상한 게임

이 영화가 흥미로운 건 이들이 싸우는 방식이다. 단순한 고함이 아니라, 상대가 어디까지 견디나 시험하고 또 시험한다. 술이 들어가면 그 잔인함은 배가 된다. 처음에는 점잖던 젊은 부부 닉과 허니마저 그 늪으로 빨려 들어간다. 젊고 탄탄해 보이는 닉 역시 출세욕과 비겁함으로 찌들어 있다는 게 드러난다. 여기서 우리는 깨닫는다. 젊음이 곧 건강한 관계를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마사가 닉의 품에 안겨 춤을 추며 조지의 자극 버튼을 사정없이 누르는 장면에 이르면 숨이 턱 막힌다. 하지만 마사만 나쁜 사람이라고 손가락질할 수 없다. 조지도 은근한 슬픔을 가장해 마사의 가장 아픈 곳을 난도질하고 있으니 말이다. 돈 문제로 얽혔던 지인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서로에게 일정 부분 '근사한 사람'이라는 환상을 투사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 환상 속에서 서로를 바라보았기에 오랫동안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지만, 막상 그 환상이 깨어지는 순간 관계는 걷잡을 수 없이 무너졌다. 이 영화가 불편한 이유는 어느 한쪽을 악역으로 밀어낼 수 없는, 그 찌질하고 복잡한 인간의 밑바닥을 그대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3.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의 마지막은 왜 그렇게 쓸쓸한가

이 영화의 가장 큰 충격은 영화 내내 실존하는 것처럼 떠들어대던 '아들'의 존재가 완전한 허구로 밝혀지는 순간이다. 아이를 가질 수 없는 차가운 현실을 견디기 위해, 두 사람이 수십 년간 함께 지어 올린 거대한 환상의 성이었던 것이다. 조지가 마사에게 아들의 '죽음'을 냉혹하게 선언하는 대목은 잔인하다 못해 서늘하다. 그것은 마사가 정신의 끈을 놓지 않기 위해 움켜쥐고 있던 마지막 동아줄을 남편의 손으로 직접 끊어버리는 일이었다. 그 장면을 보며 나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돈 문제로, 혹은 오랜 세월의 마찰로 내 곁을 떠나간 인연들을 떠올렸다. 우리는 그 관계 속에서 서로에 대한 환상을 완전히 걷어내 본 적이 있던가. 내가 겪은 인간관계의 파국들도 결국 우리가 서로에게 덧씌웠던 환상이 바닥을 드러냈을 때 찾아왔다. 조지가 마사의 환상을 깨부순 것은 단순히 괴롭히기 위해서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 붉은 거짓말 속에 유령처럼 갇혀 사는 한, 그 어떤 진실도 마주할 수 없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날이 밝고 모든 광기가 지나간 자리, 고요히 남겨진 두 사람의 모습은 비극적이면서도 묘한 여운을 남긴다.

 

마치며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는 보고 나서 마음이 편해지는 영화가 아니다. 영화가 끝난 뒤에도 '도대체 저들은 왜 저렇게까지 서로를 파괴할까'라는 질문이 앙금처럼 남는다. 하지만 나는 이 영화를 보며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만약 서로를 향한 환상을 완전히 걷어내고 나면, 그 앙상한 뼈대만 남은 자리에서 과연 서로 새롭게 시작할 무언가가 남아있을까? 조지와 마사에게 앞으로 행복한 나날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 믿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환상이 깨진 자리에는 온통 상처와 허무함뿐일지 모른다. 나 역시 내 삶의 오랜 관계들 속에서 환상이 깨어지는 아픔을 겪어보았기에 안다. 환상을 걷어낸 자리는 냉혹하고 쓸쓸하다. 하지만 그 가짜 환상을 내려놓아야만, 비로소 상처 입은 서로의 진짜 얼굴을 똑바로 마주할 수 있는 아주 희미한 가능성이라도 생기는 것이 아닐까. 이 영화는 바로 그 잔인하고도 피할 수 없는 인간 관계의 바닥을 끝까지 응시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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