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가 거의 끝났는데도 이야기가 완전히 끝난 것 같지 않은 장면이 있다. 유리 지바고와 라라의 딸일지도 모르는 타냐가 공사 현장을 걸어간다. 그녀가 어깨에 발랄라이카를 메고 있는 것을 본 예브그라프가 묻는다. 타냐가 발랄라이카를 잘 연주한다는 이야기를 듣자 그는 짧게 말한다. “그렇다면 재능이군.” 이 마지막 장면은 처음 보면 조금 이상하다. 정말 이것만으로 타냐가 유리와 라라의 딸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 걸까. 그런데 《닥터 지바고》(1965)는 여기서 끝내지 않고, 관객이 앞부분을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영화가 처음으로 돌아가면 어린 유리가 어머니가 남긴 발랄라이카를 물려받는 장면이 나온다. 어머니는 발랄라이카를 잘 연주했고, 그녀에게는 특별한 ‘재능’이 있었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TCM은 영화 초반 유리가 어머니의 발랄라이카를 물려받고, 마지막에는 타냐가 배운 적도 없이 연주한다는 설정이 이어진다고 정리한다. 이렇게 놓고 보면 마지막의 짧은 대사가 갑자기 가벼운 말처럼 들리지 않는다.
## 1. 마지막 장면에서 정말 확인되는 것은 무엇일까
타냐는 자신이 유리와 라라의 딸이라는 사실을 처음부터 인정하지 않는다. 예브그라프가 가능성을 이야기해도 타냐는 “사실이 아니라면 믿고 싶지 않다”는 태도를 보인다. 나는 이 부분이 오히려 좋았다. 영화가 마지막에 모든 것을 확실하게 설명해 버렸다면 너무 간단했을 것이다. “그래, 네가 그 딸이다.” 이렇게 끝내는 대신 타냐에게는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그런데 예브그라프는 그녀가 발랄라이카를 연주한다는 사실에서 뭔가를 발견한다. 타냐는 누가 가르쳐준 것도 아닌데 능숙하게 연주한다. 물론 현실적으로 생각하면 악기를 잘 다룬다는 사실만으로 부모를 확인할 수는 없다. 그런데 영화는 유전적인 혈연을 과학적으로 증명하려는 것이 아니다. **처음부터 이야기 속에 흩어놓은 작은 흔적들이 마지막에 한 번 연결되는 것**에 가깝다. 그래서 마지막의 발랄라이카는 단순한 소품이 아니다. 관객에게 “앞에서 이것을 본 적이 있지?”라고 묻는 장치다.
## 2. 왜 하필 발랄라이카였을까
발랄라이카는 영화 초반에도 등장한다. 어린 유리가 어머니의 죽음 뒤 그 악기를 물려받는다. 그리고 유리에게 시적인 재능이 있는지 주변 사람들이 이야기한다. 영화는 처음부터 유리의 삶과 예술적 재능을 발랄라이카라는 물건과 연결해 놓은 것이다. 그런데 영화가 끝날 때 또 다른 젊은 사람이 같은 악기를 들고 나타난다. 물론 영화 속에서 보이는 타냐의 악기가 정말 유리가 지녔던 바로 그 발랄라이카인지까지 명시적으로 설명되지는 않는다. 중요한 것은 악기 자체보다 **그 악기를 배운 적도 없는데 잘 연주한다는 설정**이다. 이게 꽤 묘하다. 유리는 어머니에게서 발랄라이카와 함께 ‘재능’이라는 말을 물려받았다. 그리고 마지막에 타냐 역시 설명하기 어려운 재능을 가진 사람으로 나타난다. 나는 그래서 영화의 마지막이 혈연관계만 확인하는 장면이라기보다 **한 사람의 삶이 사라진 뒤에도 그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 완전히 끊기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처럼 느껴졌다. 유리도 죽고, 라라도 사라졌다. 그런데 발랄라이카를 연주하는 사람이 남았다. 그것도 스스로 배우지 않았다고 말하는 사람이다.
## 3. 그러고 나면 유리가 왜 시를 썼는지도 조금 달라진다
이쯤에서 영화의 중간 부분을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유리는 혁명과 전쟁 속에서 의사로 살아가지만 동시에 계속 시를 쓴다. 라라와 함께 바리키노에 머물던 시기에도 시를 쓰고, 훗날 그의 시는 「라라의 시」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게 된다. BFI는 유리를 의사이면서 시를 쓰는 인물로 설명하고, TCM 역시 라라가 그의 중요한 시에 영감을 준다고 소개한다. 그런데 유리의 삶을 생각하면 시를 쓰는 일이 아주 편안한 취미였다고 하기는 어렵다. 그는 계속 이동한다. 집을 잃고, 가족과 떨어지고, 전쟁에 휘말리고, 라라와도 결국 헤어진다. 그렇다면 왜 계속 쓰는 걸까. 나는 여기서 발랄라이카와 시를 같이 생각해 보게 됐다. 둘 다 현실을 바꾸지는 못한다. 발랄라이카를 연주한다고 혁명이 끝나는 것도 아니고, 시를 쓴다고 사랑하는 사람과 다시 만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두 가지는 **한 사람이 자기 삶에서 겪은 것을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는 방식**이 된다. 유리가 남긴 것은 라라의 시였고, 마지막에 남은 것은 타냐에게서 이어진 음악적 재능이다. 그래서 이 영화에서 예술은 거대한 시대를 이기는 힘으로 그려지지 않는다. 그보다 훨씬 작다. 그저 사라질 것 같은 사람과 시간을 완전히 사라지지 않게 해주는 흔적에 가깝다.
## 4.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면 제목의 ‘지바고’가 조금 다르게 느껴진다
영화는 현재의 예브그라프와 타냐가 만나는 장면에서 시작하고, 그가 유리와 라라의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긴 과거로 들어간다. BFI도 이 작품을 회상 형식으로 구성된 영화로 소개한다. 처음에는 이것이 그냥 긴 사랑 이야기의 액자처럼 보인다. 하지만 마지막까지 보고 다시 처음을 생각하면 역할이 달라진다. 예브그라프가 찾고 있는 것은 단순히 유리의 딸 한 명이 아니다. 그는 **이미 사라진 사람에게서 무엇이 남았는지를 확인하려는 사람**처럼 보인다. 유리와 라라는 함께 오래 살지 못했다. 유리는 라라를 다시 만나기도 전에 죽었고, 라라는 이후 사라졌다. 그들의 딸 역시 어린 시절 전쟁 속에서 부모와 떨어졌다. 그 삶에서는 계속 사람들이 끊어진다. 그런데 마지막에는 아주 작은 것이 남아 있다. 발랄라이카. 그리고 그것을 연주하는 한 사람. 그래서 처음 장면으로 돌아가 보면 어린 유리가 어머니에게서 악기를 건네받는 모습이 전과 다르게 보인다. 그때는 한 아이가 어머니의 죽음을 겪는 장면이었다. 이제는 그 장면이 **훗날 다른 세대에게 이어질 무언가가 시작되는 장면**처럼도 보인다. 나는 이것 때문에 《닥터 지바고》의 마지막이 조금 좋았다. 물론 타냐가 정말 유리와 라라의 딸이라는 사실은 영화가 과학적으로 입증하는 것이 아니다. 마지막의 ‘재능’은 증거라기보다 영화가 관객에게 건네는 강한 암시다. 그런데 그 정도면 충분한 것 같다. 이 영화에서 모든 것은 너무 많이 사라진다. 사람도 떠나고, 집도 없어지고, 가족도 흩어진다. 그런데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 것이 하나 있다. **사람이 남긴 삶의 흔적이다.** 유리에게는 시가 있었고, 타냐에게는 발랄라이카가 있었다. 그래서 마지막에 예브그라프가 말한 “재능”이라는 한마디는 단순한 확인의 말이라기보다, 영화가 처음부터 끝까지 조용히 이어놓은 하나의 실마리를 마지막에서 알아보는 순간처럼 느껴진다. 처음에는 그냥 지나갔던 발랄라이카가 영화가 끝나고 나면 가장 중요한 물건 중 하나가 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때 비로소 《닥터 지바고》라는 긴 이야기가, 단순히 두 사람이 사랑하고 헤어진 이야기만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은 사라질 수 있지만, 그 사람이 남긴 것은 다른 사람의 삶에서 뜻밖의 모습으로 다시 나타날 수 있다.** 영화의 마지막에 남은 것은 유리도 라라도 아니었다. 그들의 이야기를 완전히 기억하지 못하는 한 젊은 여자가, 누구에게 배웠는지도 모른 채 발랄라이카를 연주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것으로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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