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속학

비석에 새겨진 삶의 서사: 망자를 기리는 돌의 언어

infodon44 2025. 11. 10. 2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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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문

 

드넓은 산자락의 무덤가나 고즈넉한 사찰 터, 또는 작은 시골 마을 어귀를 걷다 보면 세월의 풍파를 고스란히 짊어진 채 묵묵히 서 있는 돌들을 마주하게 됩니다. 바로 **비석(碑石)**입니다. 차가운 돌덩이에 불과하지만, 비석에는 망자의 이름과 그의 생애, 후손들의 간절한 마음이 새겨져 시공을 초월하여 과거와 현재를 잇는 특별한 의미를 지닙니다. 민속학자의 눈으로 비석을 들여다보면, 단순한 묘비를 넘어 죽은 자를 기억하고 산 자를 위로하며, 때로는 역사의 증언자로 서 있던 비석의 다채로운 얼굴과 그 안에 담긴 우리 민족의 죽음관과 기억 문화를 발견하게 됩니다.

 

1. 망자와 후손을 잇는 영원한 통로: '망주석(望柱石)'에 담긴 삶의 질서와 회복

무덤 앞에 세워지는 비석들은 단순히 고인의 이력을 기록하는 것을 넘어, 죽은 이와 산 자를 연결하는 중요한 매개체이자, 가문의 기억을 후세에 전달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특히 조선시대 유교 문화가 뿌리내리면서 조상 숭배가 중요해지자, 묘소의 품격과 조화를 이루는 비석의 존재는 더욱 중요해졌습니다. 그중에서도 묘소의 앞에 짝을 지어 세워지는 **'망주석(望柱石)'**은 비석의 상징성을 극대화한 독특한 민속 유물입니다. 망주석은 대개 사각 또는 팔각기둥 형태이며, 중간에 '염주(念珠)'라고 불리는 마디가 있고, 그 위에는 원통형 혹은 연꽃봉오리 모양의 덮개돌을 얹습니다. 망주석은 크게 세 가지 의미를 지닌다고 해석되는데, 첫째는 망자가 극락에서 현세를 바라보는 상징이고, 둘째는 짐승들이 묘소 주변으로 접근하는 것을 막는 기능, 그리고 셋째는 음양의 조화를 나타내는 상징입니다. 특히 망주석 상단에 새겨진 '세호(細虎)'라는 동물은 쥐처럼 생긴 형상인데, 이는 음양오행의 조화를 상징하거나 혹은 나쁜 기운을 물리치는 벽사의 의미를 가졌습니다. 이 망주석은 단순한 장식물이나 실용적인 기능을 넘어, 가족의 공동체성을 강화하고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한 안녕을 기원하는 강력한 상징물이었습니다. 조상의 묘소에 망주석을 세움으로써 후손들은 자신들이 누구로부터 이어져 왔는지를 시각적으로 확인하고, 대대로 번창하기를 바라는 염원을 망주석에 투영했습니다. 조선왕릉에서 볼 수 있는 정교하고 웅장한 망주석부터 민간 묘소의 소박한 망주석까지, 그 형태는 달라도 망주석에 담긴 후손들의 마음은 다르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망주석은 망자를 위한 영원한 안식처를 마련하는 동시에, 산 자들의 삶에 조상의 보호와 축복이 지속되기를 바라는 간절한 소망, 즉 삶의 질서와 연속성을 회복하려는 의지가 담긴 민속 유물이었습니다.

 

2. 돌에 새겨진 '불의 흔적': 망자와 이승을 잇는 염원, 비석의 변화

비석은 망자의 정보를 기록하는 기능을 넘어, 시대를 거치며 민간 신앙과 융합하여 다양한 형태와 의미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특히 화재나 재난으로 목숨을 잃은 이들을 기리고, 그 억울한 혼백이 이승에 머물지 않고 평안히 떠나기를 바라는 마음은 비석에 더욱 특별한 사연을 새겨 넣었습니다. 제주도의 **'불탄 비석'**은 이러한 민간의 염원이 담긴 독특한 사례입니다. 조선시대 제주도는 지리적 특성상 흉년과 왜구의 침략 등으로 인한 재난이 빈번했습니다. 이때 마을 전체에 화재가 발생하여 한꺼번에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거나, 부락 전체가 폐허가 되는 비극이 종종 일어났습니다. 이러한 비극적인 사건 이후, 살아남은 사람들은 희생자들의 원혼을 달래고 또 다른 재앙이 없기를 빌기 위해 '불탄 비석'을 세웠습니다. 이 비석에는 불에 타 죽은 이들의 이름과 사연을 새겨 망자의 넋을 위로하고, 그 원혼이 이승을 떠나 편안히 안식하기를 바라는 간절한 염원이 담겨 있었습니다. 일반적인 묘비가 고인의 업적과 가문을 기록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면, 불탄 비석은 비극적인 죽음의 사실과 함께 망자의 평안한 영생을 빌었던 살아있는 자들의 지극한 공포와 사랑을 담아낸 특별한 형태의 비석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일제강점기에는 제주 4.3 사건이나 한국전쟁 등으로 인해 수많은 양민들이 무고하게 희생당했습니다. 이때도 마을 주민들은 몰래 혹은 힘들게 이름조차 새기지 못한 무명(無名)의 비석들을 세워 희생자들을 추모했습니다. 비록 이름은 없지만, 그 돌은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고 역사적 비극을 기억하려는 민초들의 강력한 저항 의지와 공동체의 연대감을 담아낸 침묵의 증언자였습니다. 비석은 이처럼 단순한 망자의 기록을 넘어, 시대의 아픔과 민초들의 간절한 염원, 그리고 이를 통해 삶의 질서를 회복하려는 강한 의지를 담아내는 '돌의 언어'였던 것입니다.

 

3. ‘선돌’과 ‘돌장승’: 개인의 비석을 넘어 마을의 안녕과 연대를 기원하는 상징

비석은 개인의 무덤에 세워지는 묘비의 형태뿐만 아니라, 마을 공동체 전체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는 신앙의 대상으로서도 발전했습니다. 바로 **'선돌(立石)'**과 '돌장승' 같은 형태로 말입니다. 이들은 개인의 삶의 서사를 넘어, 마을 공동체 전체의 염원을 돌에 새긴 형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선돌은 마을의 수호신이 깃들어 있거나, 풍요와 다산을 기원하는 신앙의 대상으로 숭배되어 왔습니다. 고창 삼인리 선돌 유적군처럼 선돌 주변에 제사 흔적이 발견되는 경우가 많고, 일부 선돌에는 여성의 가슴 모양이나 남근 모양을 덧대어 풍요를 기원하는 민간 신앙의 흔적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선돌은 농경 사회에서 가장 중요했던 풍요와 생명의 순환을 비는 공동체의 염원을 담고 있습니다. 선돌을 세우는 행위는 마을 사람들의 소원을 하늘에 전하고 땅의 기운을 모아 공동체의 번영을 이루려는 집단적 의지의 표명이었던 것입니다. 한편 돌장승은 마을 어귀에 세워져 마을의 경계를 표시하고, 잡귀와 질병의 침범을 막는 벽사의 기능과 동시에 수호신의 역할을 했습니다. 지역에 따라 돌하르방과 같은 친근한 모습을 하기도 했고, 때로는 위압적인 표정으로 잡귀를 쫓는 엄숙한 모습이었습니다. 특히 **충북 진천군의 '미르다리 돌장승'**은 용 모양의 돌장승으로, 홍수 피해를 막고 다리를 튼튼하게 지켜달라는 염원이 담겨 있습니다. 이는 돌장승이 단순히 벽사의 기능을 넘어, 마을 주민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고 실질적인 도움을 주기를 바라는 간절한 소망이 담긴 구체적인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선돌과 돌장승은 개인의 기록을 넘어 마을 공동체 전체의 안녕과 연대를 돌에 새겨 넣은, 우리 민족의 살아있는 집단적 염원의 증거입니다.

 

마치며

비석은 차가운 돌이지만, 그 위에 새겨진 글자와 형상 속에는 망자의 삶의 서사와 후손들의 간절한 염원, 그리고 민족의 역사와 철학이 고스란히 응축되어 있습니다. 망주석에 담긴 삶의 질서와 연속성 회복의 의지, 불탄 비석과 무명 비석에 새겨진 비극적인 시대의 아픔과 추모, 그리고 선돌과 돌장승에 깃든 공동체의 안녕과 연대의 염원까지, 비석은 우리 민족이 죽음과 기억, 그리고 희망을 어떻게 이해하고 표현해 왔는지를 보여주는 불멸의 언어입니다. 비석은 이처럼 망자를 기리는 '돌의 언어'이자, 산 자들을 위로하고 미래를 향해 나아가게 하는 '삶의 증언자'로서, 오늘날까지도 우리에게 깊은 성찰과 감동을 선사하는 소중한 민속 유산으로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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