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네마 클래식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1967), 나는 이들의 사랑을 끝까지 낭만적으로 볼 수 없었다

infodon44 2026. 9. 16. 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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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분위기의 도로를 달리는 자동차
영화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의 보니와 클라이드를 연상시키는 오래된 자동차와 도로의 풍경

서문

아서 펜의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1967)**를 처음 보면 보니와 클라이드가 꽤 멋있어 보인다. 둘은 우연히 만나고, 차를 훔치고, 은행을 털고, 경찰을 피해 도망 다닌다. 무엇보다 두 사람에게는 평범한 사람들에게 없는 이상한 생기가 있다. 보니는 무료한 일상을 벗어나고 싶어 하고, 클라이드는 자신이 대단한 사람인 것처럼 행동한다. 그런데 영화를 다시 보니 나는 그들의 자유가 마냥 부럽지는 않았다. 처음에는 두 사람을 따라가고 싶었는데, 뒤로 갈수록 그들의 삶이 자유라기보다 **도망칠 곳이 없는 삶**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지막 장면은 단순히 비극적인 죽음이라기보다, 영화가 관객에게 그동안 무엇을 보고 무엇을 낭만적으로 받아들였는지를 되묻는 순간처럼 느껴졌다.

 

### 1. 보니가 클라이드를 따라나선 순간, 나는 이미 불안했다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의 첫 만남**은 이상하게 가볍다. 보니는 집 창가에서 지루한 표정으로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러다 밖에서 자신의 어머니 차를 훔치려는 클라이드를 발견한다. 클라이드가 차를 훔치려 한다는 사실보다 보니가 그 모습을 바라보는 표정이 더 재미있다. 그 얼굴에는 두려움보다 호기심이 먼저 있다. 그리고 두 사람은 금방 가까워진다. 클라이드는 자신이 총을 잘 다루는 것처럼 보이고, 보니는 그런 클라이드에게 묘하게 끌린다. 클라이드가 가게를 털어 보이는 장면도 그렇다. 보니에게는 평범했던 하루가 갑자기 다른 영화처럼 변한다. 나는 이 장면이 좋으면서도 조금 불안했다. 보니가 원하는 것은 처음부터 범죄였던 것 같지는 않다. **그녀가 정말 원했던 것은 자기 삶이 갑자기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는 경험이 아니었을까.** 이 점에서 보니와 클라이드는 조금 다르게 보인다. 클라이드에게 범죄는 자신을 증명하는 방법에 가깝다. 반면 보니에게는 지루한 삶에서 빠져나갈 문처럼 보인다. 그래서 두 사람이 함께 차를 타고 떠나는 장면은 자유롭게 보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위험하다. 나는 보니가 그때 조금만 다른 사람을 만났다면 전혀 다른 삶을 살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게 이 영화가 낭만적으로만 보이지 않는 첫 번째 이유다.

 

 2. 둘은 은행을 털면서도 사랑하는 연인처럼 보였다

**보니와 클라이드의 은행 강도 장면**을 보면 이 영화가 왜 당시 관객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는지 알 것 같다. 두 사람은 범죄를 저지르면서도 이상하게 장난스럽다. 차를 타고 달아나고, 서로를 바라보고, 사진을 찍고, 자신들의 모습을 기록한다. 특히 보니가 자신과 클라이드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기고 싶어 하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평범한 범죄자가 아니라 영화 속 인물인 것처럼 행동한다. 이게 재미있으면서도 나는 조금 불편했다. 실제로 그들이 저지르는 일은 사람들의 돈과 목숨을 빼앗는 범죄인데, 영화는 한동안 그것을 젊은 연인의 모험처럼 보여준다. 여기에는 보니와 클라이드의 매력뿐 아니라 **관객의 욕망도 들어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도 현실에서는 할 수 없는 일을 영화 속 인물들이 대신해주면 잠시 해방감을 느낀다. 특히 평범한 생활에 답답함을 느끼는 사람이라면 더 그럴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가 재미있는 것은 그 환상을 계속 유지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보니와 클라이드의 범죄가 점점 심해질수록 처음의 경쾌함은 조금씩 사라진다. 버크와 블랜치가 합류한 뒤에는 분위기도 달라진다. 특히 블랜치가 이들의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불안해하는 모습은 보니와 클라이드의 삶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낭만적이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나는 오히려 이런 장면들이 좋았다. 만약 영화가 처음부터 끝까지 두 사람을 멋진 반항아로만 그렸다면 지금처럼 오래 기억되지는 않았을 것 같다. **사랑도 있고 자유도 있지만, 그 안에 폭력과 불안도 같이 있다는 것.** 그 모순을 영화가 끝까지 놓지 않는다.

 

 3.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의 마지막 장면에서 나는 두 사람을 더 이상 멋있다고 생각할 수 없었다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의 마지막 장면**은 너무 유명해서 이미 알고 있어도 긴장하게 된다. 보니와 클라이드는 차를 몰고 길을 간다. 두 사람은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길가에 멈춰 있는 차와 사람을 발견하고, 클라이드는 차를 세운다. 그리고 잠시 뒤 새들이 날아오른다. 나는 이 새들이 이상하게 마음에 남았다. 평화로운 풍경처럼 보이는 순간에 갑자기 자연의 움직임이 달라진다. 마치 관객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미리 알려주는 것 같다. 실제 제작 과정에서도 마지막 매복 직전에 새들이 날아오르는 이미지를 넣자는 아이디어가 논의됐고, 이 장면은 죽음의 전조처럼 기능한다. 그 뒤의 장면은 정말 잔인하다. 보니와 클라이드는 총격을 받으면서 몸을 심하게 흔든다. 한두 발 맞고 쓰러지는 일반적인 영화의 죽음과는 다르다. 총알이 계속 몸을 관통하는 것처럼 두 사람의 몸이 끊임없이 반응한다. 나는 처음 이 장면을 봤을 때 충격보다 먼저 이상한 감정을 느꼈다. **‘조금 전까지 저 둘을 멋있다고 생각했는데.’** 그 생각이 들었다. 영화는 관객에게 두 사람의 사랑을 충분히 보여준 뒤 그 사랑을 눈앞에서 산산조각 낸다. 그래서 이 장면을 단순한 총격 장면으로 보면 조금 아쉽다. 내가 보기에는 영화가 관객의 감정까지 공격하는 장면이다. 우리는 보니와 클라이드가 범죄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런데도 그들의 자동차 여행과 농담, 서로를 바라보는 모습에 정이 들었다. 그러다 마지막 순간에는 그들이 죽지 않기를 바라게 된다. 하지만 영화는 그 기대를 허락하지 않는다. 아서 펜은 마지막 죽음을 느린 움직임과 강한 육체적 충격으로 보여줬고, 배우들의 몸이 총알에 반응하는 모습을 길게 끌고 간다. 제작진의 증언을 보면 이 장면은 실제 촬영에서도 배우들의 몸에 여러 개의 특수효과 장치를 설치해 총격의 움직임을 만들어냈다. 그래서 마지막에는 더 이상 보니와 클라이드가 멋있어 보이지 않는다. 그저 죽어가는 두 사람이 보인다. 나는 그게 이 영화의 가장 잔인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마치며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1967)**를 다른 범죄영화와 비교하면 재미있는 점이 있다. 많은 범죄영화에서는 범죄자가 마지막에 벌을 받으면 관객도 어느 정도 마음의 정리를 할 수 있다. 나쁜 일을 했으니 죽었다고 생각하면 된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는 그렇게 간단하게 끝나지 않는다. 우리는 이미 보니와 클라이드에게 정이 들어 있다. 그들이 범죄를 저지르는 것을 보면서도 웃었고, 차를 타고 달리는 모습을 보면서 자유롭다고 생각했고, 둘의 사랑을 어느 정도 응원했다. 그러다가 마지막에 그들이 처참하게 죽는 것을 본다. 그래서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범죄자를 미화한 영화인가?’라는 질문보다 ‘나는 왜 이 사람들을 응원하고 있었을까?’라는 질문을 더 오래 생각하게 됐다.** 아마 그것이 이 영화가 지금까지도 불편하면서 강렬한 이유일 것이다. 보니와 클라이드는 평범한 삶에서 도망쳤다. 하지만 도망치는 동안 자기들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는 점점 알 수 없게 됐다. 처음에는 자동차가 자유를 상징하는 것처럼 보였는데, 마지막에 그 자동차는 두 사람을 죽음이 기다리는 장소까지 데려간다. 그래서 제목도 다시 생각하게 된다.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처음에는 젊은 연인들이 세상을 향해 내뱉는 멋있는 선언처럼 들린다. 하지만 영화가 끝나고 나면 그 말은 전혀 다르게 들린다. 내일이 없다는 것은 자유로워서가 아니라, 결국 두 사람이 스스로 돌아갈 길을 너무 멀리 벗어나 버렸다는 뜻처럼 느껴진다. 나는 그래서 이 영화를 끝까지 낭만적인 사랑 이야기로 보기는 어렵다. 다만 그들이 마지막까지 서로를 바라보았다는 사실만큼은 잊히지 않는다. **멋있어서 기억되는 연인이 아니라, 멋있어 보였던 순간과 끔찍했던 현실이 동시에 기억되는 연인.** 나는 그것이 아서 펜이 만든 보니와 클라이드의 가장 묘한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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